피겨스케이팅(Others)

[스크랩] 존 커리 (John Curry)-예술적 안무를 후세에 주고 떠나간 올림픽 챔피언

irene777 2014. 7. 17. 05:57

1970년대의 피겨 스케이팅은 소련의 등장과 정치적 냉전시대의 영향으로 "블록 투표"와 "동서 문화전쟁"으로 돌입한 시기지만 그 시절 동유럽 스타일과 영미 스타일의 피겨가 복합적으로 경쟁하면서 예술적 측면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때가 아니라 후세에 남겨진 "예술적 유산"을 고려할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70년대를 대표하는 남녀 피겨 선수로서 영국의 존 커리와 미국의 자넷 린을 들게 됩니다. 그들의 피겨는 그러니까 그 시대의 다른 선수들과는 궤도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존 커리(1949 ~ 1994)의 이야기입니다.


존 커리는 어려서는 발레 댄서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크게 반대한 탓에 댄스 대신 피겨를 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정형화 된 피겨 스케이팅은 1930년대까지는 분명 "남성의 경기"였기에 발레를 하겠다는 아들을 달래 대신 예술 쪽을 하고 싶다면 피겨를 하라는 뜻이었지요. 그게 7세 때였는데요 헌데 청소년기까지의 존 커리는 그다지 피겨에 올인할 수준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를 당시 가르친 사람은 유럽의 명코치 거쉬윌러 씨였고 1969년 그는 영국 2위에 오르며 유럽 선수권 12위로 국제무대에도 이름을 알리지만 여기까지는 그리 큰 진전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2년 그는 월드 9위 올림픽 10위를 합니다. 헌데 월드 후에 한 미국인 사업가가 스폰서가 되어 줍니다. 1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훈련하던 존 커리로서는 행운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카를로 파시의 선수가 됩니다.


1974년 자그레브에서 열린  유로에서 그는 동메달을 땁니다. 헌데 그 정규 경기보다 그의 갈라가 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였습니다. 우승자도 아니면서 두 번의 앵콜을.....


1975년 유로 은메달 월드 동메달을 땄던 그의 앞에는 소련의 코발레프와 볼코프 같은 점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경기는 아름답지만 너무 여성적이고 점프가 "얌전하다"는 평이었습니다. 카를로 파시 코치는 점프 조련에 일가견이 있는 구스타프 루시 코치에게 그를 보내 점프의 안정성도 높입니다.


1976 인스부르크 올림픽 때 그는 영국 팀의 기수였습니다 (당시 26세). 그는 컴펄서리와 쇼트 모두 2위였지만 당시 소련의 두 선수 - 볼코프, 코발레프 - 와 캐나다의 크랜스톤, 동독의 얀 호프만 등이 엎치락 뒤치락이어서 그는 프리에 들어가기 전 점수로도 1위여서 프리를 우승하면 되었습니다.


그리고..그는 프리에서 9명의 저지 중 8명에게서 1위 표를 얻습니다.


 이 금메달은 그 올림픽에서 영국이 얻은 유일한 메달입니다. 그 공로로 그는 대영제국 훈장(OBE)를 받게 됩니다.



그의 갈라는 언제나 관중을 열광시켰고......이 1976 올림픽 이 폐막식 전날 피겨 갈라를 거행하게 된 첫 올림픽이라고 기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드물게..그는 1980 올림픽 갈라에도 초청되어 공연했습니다.



1987년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BBC 다큐멘터리가 존 커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는 청소년기에도 폰테인 같은 발레리나에게서 예술적 영향을 받았다 합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TV의 아이스 쇼 등에서 보이는 음악과 무브먼트의 조화와 교감 ..처음부터 그런 것이 그를 얼음 위에 있게 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 중 하나. 생일이라고 아버지가 5파운드를 주고 뭐든 사라고 했을 때 그는 레코드 점에 가서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세헤라자데,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를 샀다고 합니다. 그 자신도 왜 그렇게 샀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운명이라 할 밖에요....그리고 첫 대회에 대한 기억....그냥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스파이럴 하고 왈리 점프 하고 그러고 왔더니 다른 아이들도 비슷하게 했는데 상을 주더라는..대회인 줄도 모르고 그냥 좋아서 탄 거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거 경험한 10명의 코치 중에 자기 자신을 넣습니다. 트리플 룹은 스스로 알아서 깨우쳤다 하네요.... 



존 커리는 선수 생활 내내 훌륭한 예술성과 조금은 부족한 점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3부의 인터뷰에서 보면 존 커리는 현대적 시각에서의 "트랜지션"에 이미 눈뜨고 있었기에 다른 선수들이 오래 준비동작한 후 점프를 하는 것에 대해 그리 큰 가치를 두지 않았고 오히려 짧은 간격에서 점프를 이어나가는 것에 주력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나중에 카를로 파시는 그의 점프 훈련을 휘해 그를 구스타프 루시에게 보내게 됩니다만....


또 하나 그는 판정 시스템에 대해 적응했지만 자신의 연기에 집중했지 심판들이 주는 평가에는 그리 예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블록 투표 성향이 있기도 햇고. 컴펄서리 결과에 따라 순위가 거의 조정되던 시기이기도 했고....그래서 그는 순위보다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연기를 했는가가 중요했다 합니다.  해서 어떤 선수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당연히 그 선수가 우승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역시 심판의 농간에 따라 정해졌던 시기라 말합니다. 그리고 국가 간의 타협에 의한 메달 나눠가지기 같은 것이 가능했었다고 증언하지요(1980년 올림픽 때 제기된 문제기도 합니다)




1976 올림픽 때의 이야기가 주종이지만 말미에 "존 커리는 게이였다"에 대한 폭로 기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친하다고 생각한 기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1976 월드 직전 이를 기사화한 것입니다. 독일의 빌트 자이퉁 지였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그 기사를 결과적으로 무시해 버려서 더 큰 스캔들로 비화하지는 않습니다.



올림픽 후 그는 프로 스케이팅을 하면서 자신의 회사를 설립해 공연을 합니다. 이러면서 그의 예술적 감각과 통찰력은 "현대적 안무"의 개념을 정립하게 됩니다. 




존 커리의 세계 피겨 역사에 대한 공헌은 올림픽 금메달 하나가 아닙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유명한 안무가는 그의 안무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자신은 1994년 20년 전에 이미 사망했지만 그가 운영하던 피겨 쇼단의 안무는 많은 현대적 안무의 선구자들이 "협업"을 요청하고 같이 연구하던 곳이었습니다. 2002년 올림픽 개막식을 총감독하고 스캇 해밀턴의 평생의 안무가로 유명한, 또 지금의 데이빗 윌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안무가라고 윌슨이 말하는 전설적 안무가 사라 카와하라 씨 역시 그 때를 소중히 기억하는 인터뷰를 여러 번 했지요.


그는 성격이 붙임성이 있지 못했습니다. 아니 "다루기 어렵다"는 것이 중평이엇고 그래서 85년 경 부터는 공연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그는 HIV 바이러스 감염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1991년 AIDS로 발전하고 1994년에 그는 우리 곁을 떠납니다.  오늘 포스트의 마지막에 어쩌면 그의 마지막 공연일 수 잇는 1991년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기록에도 AIDS 통보 후에는 얼음 위에 서지 않았다 하니까요......


아래 영상은 그저 감상하시면 됩니다. 어떤 음악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이런 퍼포먼스로 나온다..


그래서 그는 "마에스트로"라 칭함을 받아 마땅합니다.














아마도 마지막 아이스 쇼였을 거라고 하는 1991년 타이 바빌로니아/랜디 가드너의 초청 아이스 쇼 tV 캠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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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맑은아찌수다방
글쓴이 : 해맑은아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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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피겨를 좋아하는 저에게 빙판위의 발레리노 John Curry는 진정 피겨계의 "니진스키"입니다...ㅎㅎ

플루셴코나 야구딘에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정말 감성을 움직이는 예술 피겨...

남싱만이 가질수 있는 아름다움과 무한한 매력의 극치를 최대치로 보여주는 연기이지요...


특히 목신의오후와 세헤라자데의 황금노예 연기는 마스터피스 입니다...

지금 봐도 목신의 오후에서는 John Curry 특유의 섬세한 표현력과 유려한 연기가 돋보이고...

세헤라자데에서는 빙판을 지배하는 황금노예의 원숙함과 카리스마와 섹시함이 함께 어우러져

정말 놀라운 연기를 보여 주네요...


John Curry를 보면 피겨는 점프가 전부가 아니라는걸 너무나 절실히느낍니다...

피겨가 지향해야할 곳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것 같기도 하구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아름다움이 피겨 스케이팅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그런면에서 보면 고난도 점프와 수많은 정해진 룰에따라 숨가쁘게 연기하는 요즘 선수들이 참 불쌍합니다...

그리고 없어진 프로대회가 너무나 아쉽네요...

현재까지 지속되었다면 틀림없이 우리 연아선수가 앞으로 최소 5년간은 챔피온일텐데...ㅎㅎ (남싱은 랑비엘...ㅋㅋ)


아 참!...제 생각인데요...랑비엘이 John Curry의 예술적 재능을 가장 많이 이어 받은것 같아요.....

아주 많이 닮았어요...몸짓도 섬세한 연기도...

특히 랑비엘의 그 매혹적인 스프레드 이글은 John Curry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