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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권석천 - ‘봉사 아니면 희생’ 미생들의 비애

irene777 2015. 7. 7. 14:34



[권석천의 시시각각]


‘봉사 아니면 희생’ 미생들의 비애


- 중앙일보  2015년 7월 6일 -





▲ 권석천

중앙일보 사회2부장



여기 횡령으로 구속된 기업 임원이 있다. 그는 구치소로 면회 온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아빠는 정말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이젠 너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할 자신이 없구나.” 그는 비자금 만드는 데 중간 다리 역할을 했다. 그가 아니었다 해도 누군가 했을 일. 하필 그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 왜 지시를 거부하지 않았느냐고? 인사 불이익을 받고 임원실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주어진 결정에 순응해야 가족 생계와 사회적 삶이 보장되는 실무자는 고달프고도 위태롭다. 지금도 숱한 샐러리맨들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을 터. 꽉 짜인 조직에서 개인의 양심이란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일 뿐이다. 


나는 사찰 사건으로 검찰청 앞에 섰던 총리실 직원들을 떠올리곤 한다. 잘나가는 공무원들이었던 그들은 민간인의 뒤를 캐거나 증거를 파쇄했다는, 불미스러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들 뒤편에 숨어 있던 자들은 안전하고 무사했다. 비슷한 일이 이번 정부에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정윤회 문건’ 수사 당시 문건 유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최모 경위가 자신의 흰색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함께 조사받던 동료 경찰관에게 유서를 남겼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회사 차원의 문제이나 이제라도 우리 회사의 명예를 지키고….” 


의혹의 핵심 인물들은 최 경위 유족의 통곡 속에서 ‘면죄부’를 발급받고 페이드아웃됐다. 권력 내부의 갈등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는데도 진심 어린 사과는 들리지 않았다. 검찰이 인사 개입 의혹을 계속 수사하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을 믿는 이는 없다. 


지난 2일 막을 내린 ‘성완종 리스트’ 수사에서도 구속자는 성 전 회장의 측근 임직원 두 명뿐이었다. 회사 지출 내역 등 증거 자료를 감추거나 없앤 혐의다. 정작 성 전 회장이 남긴 메모에 올랐던 8인의 정·관계 인사들은 불구속 기소(2명), 혐의 없음(5명), 공소권 없음(1명)으로 마무리됐다.


성 전 회장 측근들은 검찰의 징역형 구형에 “월급이 가족의 생계 수단인 평범한 가장으로 회사를 살려보려고 했던 일”이라고 하소연한다. 그런다고 비즈니스의 법칙이 달라지진 않는다. 실무자들이 구속되거나, 죽거나, 버려지는 사이에,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오늘도 무사히’ 컴백한다. 한 로스쿨 교수는 “실무자도 처벌받아야 하지만 형사책임이 힘의 서열 역순으로 재분배되는 건 정의가 아니다”고 말한다. 


“돈도, 빽(배경)도 없는 아이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는 건 위선 아닌지, 죄의식이 들곤 해요. 남이 내민 서류에 함부로 사인하지 마라, 어떻게든 빠져나갈 알리바이를 남겨라, 남의 잘못까지 책임지려고 하지 마라, 차라리 그런 걸 가르치는 게….” 


더 씁쓸한 건 실무자들을 조사하는 검사들 역시 실무자란 사실이다. 성완종 수사 발표에서 돋보인 대목은 특별사면 의혹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은 사면 대가로 5억원을 받은 혐의가 있으나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기소하지도 않을 일을 왜 그토록 친절하게 설명했나. 형식만 대국민 발표였을 뿐, 대통령을 향한 보고였던 것 아닐까. ‘기성전평(起成轉平·성완종으로 시작해서 노건평으로 끝났다)’이란 사자성어가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도덕적 공허함만 남기고 있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선 희생하는 사람과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피고인)는 국가를 위해 희생했고, 나(검사)는 봉사했다.”


영화 ‘소수의견’은 사건을 조작한 검사의 이 한마디를 던지고 끝난다. 의원들이 선출한 원내대표조차 대통령 앞에선 미생(未生)이요, ‘봉사 아니면 희생’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는 것이다. 봉사와 희생 사이에 다른 선택지는 없는가. ‘법 앞에 평등’은 법전 속에 박제된 원칙인가. 미생들의 비애와 의문을 삼키며 굴러가는 이 사회는 이미 밑동부터 썩어 있는지 모른다.



- 중앙일보  권석천 사회2부장 -



<출처 : http://joongang.joins.com/article/803/18173803.html?c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