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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스승과 제자

irene777 2015. 8. 6. 18:28



스승과 제자


진실의길  정운현 칼럼


- 2015년 7월 23일 -




1800년 정조가 죽자 다산 정약용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정조는 다산의 인품과 재능을 높이 사 곁에 두고 중용했다. 정조가 죽은 그 이듬해 신유사옥이 터졌다.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다산은 약전·약종 두 형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그해 2월 출옥과 동시에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에는 다시 전남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 유배시절 동네 사람들은 ‘죄인’인 다산을 피하였다. 할 수 없이 다산은 동네 주막집의 방 한 칸을 얻어서 생활하면서 동네 아이들의 훈장노릇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상이라는 열다섯 살 난 동네 소년이 다산을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하다(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도 공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산은 그런 황상이 한 눈에 마음에 들어 제자로 받아주었다. 황상은 다산이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요, 다산이 죽고 나서도 하늘처럼 받들었다. 스승의 부음을 전해 듣자 전남 강진에서 경기도 남양주까지 꼬박 18일간을 걸어서 스승의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의 발은 부르터지고 얼굴은 검게 그을려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 때 황상의 나이 예순 하나였다. 시골동네의 소년을 반듯한 선비로 만든 스승 다산, 생사를 넘나들며 스승을 하늘처럼 모신 제자 황상. 사제 간의 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단순한 문인화가 아니다. 여기엔 사제 간의 정이 빚은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서예가이자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는 말년에 옥사에 연루돼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유배시절 추사를 챙긴 제자가 하나 있었다. 당대의 대표적 역관(譯官)으로 불리던 이상적이 그였다. 업무상 중국 연경으로 출장을 자주 다니던 그는 그곳에서 어렵게 구한 책을 스승 추사에게 보내주곤 했다.


제주 유배 4년 차이던 1843년 이상적이 보내온 책을 받아든 추사는 붓을 들어 ‘세한도’를 그렸다. 그리고는 그 발문에서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며 감격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는 화제(畵題) 하단에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의 도장을 찍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랄까. 추사의 세한도를 받아든 이상적은 감사편지에서 “삼가 ‘세한도’ 한 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感慨)가 진실 되고 절절하였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사람간의 인연을 겁(劫)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천겁은 같은 나라에 태어나며, 7천겁은 부부, 8천겁은 부모와 자식, 9천겁은 형제, 그리고 1만겁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요 며칠 모 대학의 ‘인분 교수’ 얘기가 화제다. 그 교수는 제자를 야구방망이로 때리고 인분까지 먹였다고 한다. 범망경이 엉터리인가, 아니면 그 교수가 인간이 아닌 것일까. 한 마디로 말세다.



<출처 :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wh_jung&uid=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