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시시각각]
진격의 대법원
- 중앙일보 2015년 7월 27일 -
▲ 권석천
중앙일보 사회2부장
“지금부터 문서 작성 레시피를 알려드립니다. 저기 조는 분 계신데 정신 차리고 주목하세요. 우선, 업무를 하면서 불가피하게 문서를 정리해 놓아야 할 때 개인적인 신변잡기를 중간 중간 넣습니다. 여행 계획, 건강 정보, 경조사 일정, 자질구레할수록 좋고요. 허접한 기사들도 컨트롤(Ctrl) C, 컨트롤 V 하시고….”
추측이다. 하지만 상당히 가능성 높은 추측이다. 대외비 작업이 필요한 정부 기관이나 기업에선 이런 내부 특강을 실시하지 않을까.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은 지난 16일 대법원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을 통해서다.
대법원이 원 전 원장 선거법 위반 혐의에 유죄를 선고한 서울고법 판결을 깬 이유는 단 하나다. ‘국정원 직원 김모씨 e메일에 첨부됐던 문서파일 두 개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 이들 파일이 중요했던 건 국정원 댓글 활동과 관련된 트위터 계정 269개 목록이 기재돼 있어서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법정에서 그 존재를 부인하지 못했다.
“안보5팀에는 22명의 팀원이 있다. 파일에 기재된 22명의 이름은 팀원들 이름의 앞 두 글자와 일치한다.”(안보5팀장 이OO)
“‘이봉, rose9988’ 아래에 내가 사용한 트위터 계정 21개가 있다. rose9988은 계정들에 공통으로 쓴 비밀번호다.”(팀원 이봉O)
“내 e메일함에 있다면 내 e메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문서파일을) 작성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e메일 주인 김씨)
대법관들은 문제의 파일들이 형사소송법상 ‘기타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문서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단편적이고 조악한 형태의 언론기사 등이고 ▶기재된 트위터 계정은 그 정보의 근원, 기재 경위, 정황이 불분명하며 ▶개인적인 신변잡기 정보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269개의 트위터 계정은 무엇이냐’다. 트위터들의 사용자는 누구고, 트위터에 담긴 정치·선거 관련 글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트위터들을 증거법의 면도날로 도려낸 것은 ‘불과 연기’의 인과관계를 부인한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불가지론에 가깝다.
13명이나 되는 대법관들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권의 눈치를 보기 위해 판결 방향을 틀었다고 믿고 싶지 않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더 큰일 아닌지 두려움을 지울 수 없다. 이번 판결이 형사재판 전반에 미칠 영향 때문이다.
판사들도 신(神)이 아닌 이상 재판에 제출된 증거와 진술, 정황을 놓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증거라는 것이 법정 밖에서 힘 있는 기관, 돈 있는 자들에 의해 편집되고, 세탁되고, 삭제되기 쉽다는 데 있다. 핵심 증인을 빼돌리거나 증거와 진술을 마사지해서 법망을 빠져나가는 현상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저인망식 수사는 온당치 않고, 검사가 할 일을 판사가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증거능력의 인정범위를 과도하게 좁혀놓는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부정의를 방관하는 결과를 낳는다. 서초동 법조타운에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나 ‘한국판 O J 심슨 사건’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원세훈 판결만이 아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전교조 법외노조, 과거사 국가배상·…. 사회적 이슈가 됐던 주요 사건 결론이 대법원에서 뒤집히고 있다. 20년차 이상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들 판단이 틀렸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어떤 부분들이 문제인지 명쾌하게 지적하고 설득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게 하급심에 대한 예의다. 최고법원의 존재감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런 줄 알고 따르라”며 ‘판사동일체’를 요구하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큼이나 사회구성원들이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23일 ‘성공보수 무효’ 판결문에 대법관들이 덧붙인 말이다. 대법원에 묻는다. 정녕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재판을 하고 있는가.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 중앙일보 권석천 사회2부장 -
<출처 :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320398&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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