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권석천 - “어이, 우리 잊으면 안 돼!”

irene777 2015. 10. 29. 21:29



[권석천의 시시각각]


“어이, 우리 잊으면 안 돼!”


- 중앙일보  2015년 10월 26일 -





▲ 권석천

중앙일보 사회2부장



나, 옥윤이야. 영화 ‘암살’에 나온 안옥윤. 난 계나에게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어. 1930년대 독립운동을 하던 내가 “한국이 싫어서”라고 말하는 2015년의 계나에게 어떤 얘길 해줄 수 있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어.


오늘 펜을 든 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주 여야 지도부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지. “현재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이고 북한이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서술돼 있다. 국정교과서는 불가피하다.” 그 얘길 듣고 문득 네가 생각났어.


계나. 넌 말했지.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나는 대통령에게 묻고 싶었어. 취업난에, 양극화에 좌절하는 젊은이들 마음을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닌가. 교과서 밖 현실에 대한 책임을 교과서에 돌리고 있는 건 아닌가.


언젠가 읽은 글이 떠올랐어. “아버지께서 가신 후 어언 10여 년의 세월 동안 1년에도 몇 차례 묘소를 참배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 생전의 나라 사랑 하신 뜻과 업적이 바르게 알려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곤 한다.”(1997년 ‘한국논단’) ‘박근혜 박정희 前 대통령 장녀’ 이름으로 된 기고문은 묻고 있었어. “아버지께서 당대에 박수 받는 방법을 모르셨겠는가. 그때그때를 속 편하게 모면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방법을 모르셨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교과서 국정화를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진 않아. 대통령은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을 대표하고 있는 거야. 한국특파원 출신 영국인이 쓴 책을 보면 ▶한국인들이 북한 축구팀을 응원하는 건 공산주의 사고방식 때문이고 ▶386세대에 투표권이 있는 게 안타깝고 ▶노조 역시 백해무익한 존재라고 외신기자들 앞에서 버젓이 말하는 장관이 나와.(다니엘 튜더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청와대와 여당은 “정부와 전문가에게 맡기자”고 하지만 그런 정신세계에 살고 있는 관료들이 ‘올바른 역사 교과서’ 만들 능력과 자세가 돼 있는지, 난 솔직히 모르겠어.


따지고 보면 좌편향 교과서든, 우편향 교과서든, 국정 교과서든 암기하고 시험 보기 위한 거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역사 수업은 앞서 살았던 선배들의 공(功)은 무엇이고 과오는 무엇인지 토론하는 시간, 우리가 그들이라면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자리가 돼야 하잖아. 역사 교육의 시스템부터 고민해야 할 상황에서 교과서 하나만 만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그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아.


계나. 내가 걱정하는 건 국정화 논란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미칠 영향이야. 만약 친일과 독재가 ‘어쩔 수 없는 친일’ ‘불가피한 독재’였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 될까. 소극적 친일은 친일이 아니라는 공식이 통용된다면, 앞으로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누가 정의롭게 나서려고 할까. 내 아버지, 친일파 강인국처럼 “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고 변명하면 되는데, 밀정 염석진처럼 “해방될지 몰랐으니까”라고 말하면 되는데….


더 가슴 아픈 건 일제에, 그리고 독재에 맞서 싸웠던 이들이야. 개인의 입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 되는데도 가족들 뿌리치고 만주로, 상하이로, 민주화 현장으로 향했던 그들은 무정하거나 멍청한 자들이 되고 말겠지. 그렇게 역사가 이긴 자의 전리품이 된다면 어느 누가 ‘올바른 역사’를 위해 살려고 하겠어.


“어이, 3000불! 우리 잊으면 안 돼!” 아직도 귓전을 울리고 있어. 날 구하려고 죽음의 터널로 들어가며 그들이 남긴 그 목소리가. 그래. 그들이 잊지 말라고 한 건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어. 이 땅에서 강인국, 염석진의 후예들과 살아갈 우릴 위해서였어.


어쩌면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알려주는” 건 우리가 잊지 않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잊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계나. 계나는 어떻게 생각해?



- 중앙일보  권석천 사회2부장 -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18931818?c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