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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영명 - 퇴화하는 대통령

irene777 2015. 11. 11. 23:58



퇴화하는 대통령


- 경향신문  2015년 11월 10일 -



  


▲ 김영명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한국 민주주의는 문민화(김영삼), 건국 이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김대중), 3김 보스 정치의 종식(노무현)을 거치면서 한 단계씩 착실히 진화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가 이명박 대통령 이후 퇴화하고 있다. 이명박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경멸한 사람이었고, 그의 대통령 자격 없음을 국민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다음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와는 다른 사람이어야 하겠지,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명박과 반대되는 사람은 정치를 제대로 알고 도덕성을 갖춘 사람일 것이다. 반대되는 의견과 충돌하는 이익들 사이에서 합의를 끌어내거나 더 나아가 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통 큰 지도자여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의 사람을 유권자들이 뽑았던 것 같다. 그래서 탄생한 대통령이 박근혜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아니 그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정치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함을 이명박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천하에 알렸다. 좌충우돌 사업가 이명박과는 달리 박 대통령은 궁전에서 시종들에게 호령하는 공주임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나는 대통령 선거 당시 그녀에게서 독재자의 기질이 다분함을 보고 대통령이 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야권의 김용민 등이 한심한 짓을 하고 진보파 이정희 후보가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 운운하는 것을 보고 ‘박근혜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과 대비되는 깔끔한 이미지와 야권의 어리석은 행동들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물론 박정희 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명박은 잘했든 잘 못했든 4대강이라도 파헤치지 않았는가? 박 대통령이 잘하는 일은 아랫사람을 나무라면서 유체이탈 하는 것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때도 메르스 사태 때도 대통령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고 모두 아랫사람들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 중요하게, 그녀에게는 사랑과 정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세월호 희생자들 때문에 정말로 가슴 아팠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비판을 의식했는지 박 대통령은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지금의 역사교과서들에 문제가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올바른 국사’를 만들겠다는 그녀의 발상은 민주주의 퇴보 이상으로 대한민국의 수준을 낮추는 일이라서 세계에 부끄럽다. 현대판 분서갱유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박 대통령다운 결기를 이런 일이 아니라 국민을 사랑하는 일에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를 기리는 효심의 반만큼만 국민을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강점은 부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김영삼이 내세웠던 건강과 마찬가지로 기본 요건일 뿐이다. 한국 정치인들이 워낙 부패해 그것이 강점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 외에 필요한 지도자의 덕목으로 그녀에게 무엇이 있을까? 반대 의견을 아우르고 설득하거나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의 덕목이 없다. 


얼마 전 보여준 유승민 여당 원내대표를 내친 과정은 개인 감정의 유치한 분출일 뿐이었다. 그 정도의 당내 비판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 자격이 있을까?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용렬한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명박 시절부터 한국 민주주의와 대통령은 퇴화하고 있다. 


다시 진화해야 한다. 다음 대통령은 자잘한 충돌을 아우를 수 있는 ‘어른’이거나 서로 다른 이해의 조정에 능한 협상가가 되었으면 한다. 더 중요하게, 사람에 대한 따뜻한 정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아직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102047585&code=99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