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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권석천 - 왕의 노여움이 부른 내부자들 거래

irene777 2015. 12. 9. 02:36



[권석천의 시시각각]


왕의 노여움이 부른 내부자들 거래


- 중앙일보  2015년 12월 7일 -





▲ 권석천

중앙일보 사회2부장



내부자와 외부자를 가르는 사이 분열과 불신의 압력은 높아진다


“아이가 ‘어른들에게 속았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 포차’에서 대기업 부장 K가 고3 아들의 ‘배신감’을 얘기한 건 500㏄ 맥주잔이 반쯤 비었을 때였다. 강남 자사고 선두권으로 의대까지 바라보던 K의 아들은 수능에서 영어에 고전한 뒤 그 후유증에 다른 과목까지 흔들렸다고 한다. “교육과정평가원에서 ‘지난해 출제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의평가도 그렇게 나왔고요. 아이가 그러더군요. ‘난이도 달라진다’ 한마디만 해줬어도 심화문제 풀어서 대비할 수 있었다고.”


그는 강남 학부모들 사이에 ‘박근혜 효과’란 말이 나돌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물수능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던 상황에서 변별력은 높여야겠고, 사교육 잡겠다며 ‘쉬운 수능’을 강조해 온 대통령에게 깨질까 봐 그대로 발표할 순 없고…. 그러다 이런 일이 빚어진 것 아니냐는 얘기죠.”


수능 난이도 발표에까지 대통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믿고 싶진 않다. 다만 그런 시나리오가 불거지는 현실은 박근혜 정부의 내부 소통이 보이고 있는 디스크 증상과 무관치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소통 단절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일 법무부가 TV 생중계로 ‘사법시험 폐지 4년 유예’를 발표하고 바로 다음 날 드러난 내막은 암담했다. 교육부는 발표 당일 아침에, 대법원은 발표 20분 전에 내용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이상민 국회 법사위원장이 “부적절하다”고 만류했지만 법무부 발표는 강행됐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그 배경을 이렇게 짐작한다.


“사전 조율이 필요한 사안인데… 국회, 대법원, 교육부를 우습게 본 거죠. 당연히 청와대 OK는 받았을 겁니다.”


로스쿨 반발에 법무부가 “최종 입장이 아니다”고 물러서면서 한 편의 소극(笑劇)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비대해진 법무·검찰 권력, 형체만 남은 3권 분립만 확인시켜준 꼴이 됐다. 그 책임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음은 그가 행정부 수반이기 때문이 아니다. 불통의 발원지가 대통령 자신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언급하며 이슬람국가(IS)를 거론한 건 단순한 비유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며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를 압박했던 것이나 “진실한 사람들만 선택해 달라”며 국회를 비판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전화 통화와 사석에서 오가야 할 불편한 감정들을 국무회의란 공적 자리에서 국정 현안으로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목표점은 분명하다. 순응하지 않는 자에게 레드카드를 들어 보임으로써 내부자와 외부자를 갈라 세우는 것이다. 내부자는 진실한 사람이 되지만 외부자는 위험요인이 되고 만다. 소통은 내부자들의 음습한 거래로만 이뤄진다.


문제는 이러한 역린(逆鱗·왕의 노여움) 자극하지 않기가 공직사회 전반으로 전염된다는 사실이다. 법무부는 과거사 사건 재심에서 ‘무죄 구형’을 했던 임은정 검사를 심층 적격 심사 대상에 올렸다. 임 검사는 법원에서 징계 취소 판결을 받았지만 부적격 판정이 나오면 강제 퇴직해야 한다. 함께 호흡하기 싫은 자를 찍어내는 양상은 유진룡 문화부 장관 경질,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때와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무서워, 조직 논리가 겁나서 제대로 의견을 말하고 보고하지 못한다면 결국 어디에선가 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다.


그날, K는 우울한 눈으로 이런 말을 했다. “세월호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을 믿고 있다가 아이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같은 해 태어난 고3들이 사회에 나오면서 불신하는 법부터 배우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불편함을 참아내고, 나와 다른 목소리를 존중하고, 그 권리를 지켜주는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우리가 뽑은 건 무소불위의 총통이 아니라 헌법 아래 있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법과 원칙’이 분열과 불신을 키우고 가면을 부르는 상황이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



- 중앙일보  권석천 사회2부장 -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19200618?c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