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정치가 없는 나라
- 경향신문 2015년 12월 24일 -
▲ 김준형
한동대 교수 (정치학)
대한민국의 오늘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다시 끄집어내게 만드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장 흔한 번역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정치적이며, 정치를 떠날 수 없다는 해석은 정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원문을 직접 번역한 천병희는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 보다 원문에 가까운 뜻이라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정치와 국가의 불가분의 관계가 주목을 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정치공동체인 국가를 만든다. 하지만 모여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치열한 투쟁이 시작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서 정치를 빼고 나면 ‘동물’만 남는다. 이는 인간이 정치를 잃어버리면, 인간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짐승이 되고, 인간사회는 아귀다툼의 정글이 된다는 말로 귀결된다. 짐승의 세계에서는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으면 그만이고, 그것은 자연법칙이지만, 인간은 정치를 통해 다툼을 멈추고 타협하며 살아가려 한다. 본능을 극복하는 이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성이 동물이 갖지 못한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며, 정치가 바로 그런 이성을 실천하는 영역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 가진 가장 결정적인 함의는 민주주의에 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평가할 때 시민계급의 엘리트적 민주주의라는 한계가 있지만 태동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며, 또한 참여와 배제의 차원보다 더 중요한 원칙이 예측가능성이었다. 당시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제국들에 비해 도시국가를 이상적인 국가로 간주했던 이유는 바로 이 예측가능성에 있었다. 즉, 이들 제국은 1인 군왕이 다수의 신민을 사유물로 간주하고 기분대로 통치했기에 예측이 불가능했다. 즉 국가가 전적으로 군주의 사적영역이었다. 반면에 그리스 도시국가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나눠져, 공적영역은 시민들의 민주주의 원칙과 법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졌다. 정치는 예측이 가능한 공적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을 가리켰다는 것이다. 영어로 정치를 뜻하는 politics가 바로 이런 폴리스의 민주주의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고, 독재는 아예 정치가 될 수조차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잣대로 판단하면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가 없는 나라다. 우선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줘야 하는데 그럴 능력은 물론이고 관심마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작년 세월호와 올해 메르스 사태에서 똑똑히 목도했다. 국민 생존을 위한다는 국가의 최소 존재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정치권력이 강자의 편에 서 있는 한 이미 인간정치의 자격을 상실했다. 강자의 횡포는 보장되고, 약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잔인하고 천박한 자본주의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내면, 이를 줄이고 보완해야 할 정치권력이 오히려 확대재생산에 앞장선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오늘날 한국의 정치는 권력의 과도한 1인 집중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예측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다. 삼권분립도 흔들리고 정당정치는 궤멸 지경이다. 국가를 사유물처럼 자기 방식대로만 끌어가고, 국민을 향해 노기를 띠며,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는 대통령을 견제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다. 여당의 입은 국민을 향하지만, 눈과 무릎은 대통령을 향한다. 무릎을 굽히지 않는 자는 축출당하고, 굽히는 자는 버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그들의 동물적 권력욕은 한 사람에게는 무조건 굽히고,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오만하다. 야당은 견제는커녕 무대에서도 밀려나 홀로 자해시위 중이다. 권력자에게는 꽃놀이패지만 국민들에게는 악수요 필패다.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혼용무도(昏庸無道)’처럼 나라가 어지러워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로 인해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도리 대신 정치를 넣으면 딱 맞는 상황이다. 정치가 없는 나라다.
국가의 진짜 주인이 정치를 되살릴 때이다.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 되어, 군주의 가신으로 호가호위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직접 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가 맞고, 정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은 그뿐이다.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경구가 더욱 통렬하게 다가온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24203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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