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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원호 - ‘선거캠프 정당’을 넘어서

irene777 2016. 1. 22. 16:47



[정동칼럼]


‘선거캠프 정당’을 넘어서


- 경향신문  2016년 1월 12일 -





▲ 박원호

서울대 교수 (정치학)



정당이 생성되고 소멸하거나 개명(改名)하고, 정치인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풍경이다. 최근 제1야당은 새로운 이름을 지었고 몇 개의 분파가 갈라져 나와 창당했거나 새로운 합당을 추진 중이며, 정치인들은 탈당과 입당을 거듭하고 있다. 여당도 사정이 그렇게 다르지는 않은 것이, 그 당명과 상징색을 매우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 불과 4년 전 총선 직전의 일이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당들의 이러한 멈추지 않는 급격한 변신은 한국정치를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속성이라 할 만하다.


이는 마케팅 전문가들이 본다면 매우 의아해할 일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이 상품 브랜드를 통해 구매할 결정적 정보를 얻는 것처럼 유권자들이 정당이라는 상표를 보고 후보자에게 투표한다면, 우리의 정당들은 끊임없이 자사(自社) 브랜드 변경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어느 날 아이폰 신제품이 오렌지 로고를 달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한국의 유권자들은 정당의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나의 정당’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찾을 수 있으며, 프로야구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선거개표 방송에서 그 정당이 공천한 후보가 승리하기를 바라면서 밤을 지새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선거와 정치는 정당명 없이도, 정당 집권 평가의 역사 없이도, 정당이 표방하는 바가 무엇이며 미래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 없이도, 얼마든지 치를 수 있고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가 건강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으며, 그것이 바로 이러한 ‘정당의 실패’에 연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정당이 정치엘리트들의 허울 좋은 권력조직에 불과하며 이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표를 던질 유권자들과 표를 얻을 후보자이며, 이 양자를 매개하는, 혹은 가로막고 있는 정당은 너무도 거추장스럽고 둔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선거공약을 낱낱이 찾아볼 수 있고 운만 좋으면 SNS를 통해 후보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세상에서 정당이라는 조직은 지난 세기의 낡은 조직으로 보일 것이다.


정당이 인기투표 같은 여론조사로 후보자 공천을 결정하고, 홍보 전문가를 초빙하여 당명을 갈음하며, 포커스 그룹을 통해 공약을 확정하는 일이 여야를 막론하고 당연시된 것은 이러한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정치와 선거가 이렇게 진행되는 자리에서 정당이라는 것은 공중으로 휘발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선거캠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정당은 선거캠프 정당이며 한국의 정치는 새로운 선거캠프들이 끊임없이 이전 선거캠프들이 운영하는 정부를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이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다면 유권자들에게 친숙한 정치 브랜드가 무엇인지를 되새겨 볼 일이다. 친박, 비박, 진박, 친노, 비노, 안신당 등이 최근 쓰이기 시작한 브랜드라면, YS, DJ, JP 등은 이전 시대의 브랜드였고 유권자들에게 정작 정당명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당이 선거캠프로 대체된 정치에는 휘발되는 것들이 있다. 우선 정치적 신념과 장기적 비전이 휘발되고, 따라서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리품을 캠프에서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둘째, 무엇이 옳고 바람직한지에 대한 토론과 반성이 휘발되고, 상대를 어떻게 제압할 것인지만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셋째, 정치의 기억, 혹은 정치사(史)가 휘발되어 여당은 이전의 집권을 계승도 반성도 하지 않으며 야당은 집권 때의 책임감을 편리하게도 잊고 있다. 이런 무수한 선거캠프 정부들의 악순환 끝에 우리는 위태롭게 서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정당이 스스로의 이름을 바로 세우고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대중 앞에서 당당히 공표하며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이들의 심판을 겸허히 받는 일이다. 이는 현실을 모르는 백면서생의 주장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정치란 이름을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한다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기도 하다. 여론조사로 스스로의 이름부터 후보자 공천까지를 결정하고 국정운영 지지도로 정책이 좌우되는 정당들에 나는 다음의 물음들을 던지고 싶다.


새누리, 더민주, 국민의당, 당신들이 누군지 우리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왜 당신들을 지지해야 하며 어디로 우리를 끌어가고 싶은지 말할 수 있는가. 당신들은 어떤 꿈을 꾸는가. 그것이 당신들의 이름이 정말 맞는가.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122041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