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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태섭 - 민주주의자 선언

irene777 2016. 4. 9. 02:46



[별별시선]


민주주의자 선언


- 경향신문  2016년 4월 8일 -





▲ 최태섭

‘잉여사회’ 저자



선거철이 되면 기분이 묘해진다. 언론, 정당, 국가가 갑자기 나를 다섯 살짜리 취급하기 때문이다. 선거법도 그렇다. 선거법 안에서 유권자는 판단력을 갖춘 시민이 아니라 미풍에 흔들리는 갈대다. 선거법은 유권자와 후보자가 최대한 만날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이 선거에 대해서 최대한 의견을 표명할 수 없도록 막는다.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선거를 치르던 시절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는 하지만 부자연스럽고, 제한적이다.


그뿐인가, 이번의 1여다야 구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우리의 선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맹점이다. 한 정당이 40%의 득표를 했다면 그 정당은 40%의 의석을 가져가야 하지만, 현실은 40%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과반을 넘어 개헌선을 바라보는 실정이다. 선거제도가 유권자들의 소신투표를 방해하고 실질적인 선택 압력을 넣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구도 안에서 국민은 제도정치와 정치인들을 믿지 않고, 그들 역시 국민을 믿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여 자극과 반응, 더하기와 빼기로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정치공학이다. 이는 다분히 현재의 선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기만적 요소들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선택을 가장 비정치적이고 기계적인 중립적 방식을 통해 해야 한다는 모순이 현 제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구도는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자원과 정보를 가진 대규모의 집단이 명백히 유리하다. 거대 양당이 선거법 개악에 합의하기로 한 것도 결국 빤히 보이는 계산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그간 현실을 압도하는 수많은 고통들에 대해 해법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하나의 단순한 주장이나 요구도 제도정치의 블랙박스를 거치고 나면 정반대의 주장이 되곤 한다. 청년을 위한 비정규직 확산, 테러를 막기 위해 자국민을 무제한으로 감청하는 테러방지법 같은 것들처럼 말이다. 정치공학이 막고 있는 것은 결론으로 나가기 위한 치열한 과정, 즉 정치 그 자체다.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인간도 보이는 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그런 인간들이 모인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공학은 사회의 단면도를 보고 이야기하지만, 그 단면도는 하루하루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여론조사처럼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기 어렵다.


우리의 정치제도가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끌어안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품 안에 있다. 지금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스스로의 현재와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결정할 권한을 가진 이들이다. 물론 우리의 필요와 요구가 알아서 제도정치에 반영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상당부분을 포함해 우리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손에 있는 것은 투표권만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국가를 중지시킬 수도 있고, 경제구도를 뒤바꿀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 별다른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민주공화국의 시민이기만 하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기로 결심한다면 결국에는 해낼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거나, 안주하거나, 때를 기다려야만 할 이유가 없으며 언제든지 박차고 나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죄를 지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그 고통을 너무 쉽게 용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궁극의 권한에 대해 까맣게 잊곤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미래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082119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