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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원책 - 보수의 비극

irene777 2016. 4. 29. 18:38



[시론]


보수의 비극


- 경향신문  2016년 4월 27일 -





▲ 전원책 변호사



여당이 총선에서 참패했다. 모든 이의 예상을 깬 패배였다. 놀라운 건 누구도 여당의 패배를 ‘보수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새누리당을 보수정당이라고 하기엔 마뜩잖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4년 전 한나라당의 대선주자 박근혜 의원이 당권까지 장악하면서 비대위에서 당명과 상징 색을 바꿀 때 반발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2인자였던 김종인 비대위원은 사회민주주의 구호인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당에서 ‘보수’라는 말을 빼내야 한다고 외쳤다. 박근혜 후보는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영·유아 무상보육과 함께 스웨덴도 후퇴한 노령연금 정책을 내놓았다. 새누리당은 이미 보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전에 박근혜 후보는 ‘국민과의 약속’을 명분으로 세종시를 관철시켰다. 행정비효율뿐 아니라 국가위기 때 대응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무시됐다. 충청표 때문이었다. 이처럼 모든 정책 결정엔 대선에 도움이 되는지가 잣대였다. 이러니 지난 대선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그저 대북정책만 다를 뿐인 좌우, 지역대결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우리 정치의 민낯을 보았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개명하고 좌파의 상징 색인 붉은 옷을 입으면서 정명(正名)을 찾기는커녕 본색(本色)마저 버렸을 때, 이 정당이 보수를 대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 새누리당 역시 박근혜라는 보스를 따라 모인 붕당에 불과했다.


그 판단이 옳았다는 건 이내 증명됐다. 청와대와 당에는 십상시(十常侍) 같은 아첨꾼이 설쳐댔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같은 국가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와 여당의 능력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재원 없는 복지로 국가부채는 폭증하는데도 증세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공무원 연금개혁은 용두사미가 됐다. 게다가 세수 목적으로 담뱃값을 올리는 것 같은 편한 수법만 썼다.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4대 개혁은 여전히 추진 중이고 청년실업은 도를 넘었으며 불황으로 도산하는 자영업자가 속출했다. 중산층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도 모두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솔직히 거기엔 엉터리 여론조사와 이에 편승한 언론도 한몫을 했다. 야당분열로 인한 일여다야 구도가 여당의 낙관을 불렀다. 당 대표부터 국회선진화법을 무너뜨릴 180석을 얻는다는 둥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게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커튼 뒤의 권력의 엄호를 받은 공관위는 무소불위의 칼춤을 추었다. 진박마케팅 같은 어처구니없는 편 가르기 작태 끝에 정권 실세의 막말 사건까지 터졌다. 권력의 오만이 선을 넘었던 것이다. 마침내 옥새 파동을 벌였을 때 새누리당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러나 낙관은 계속됐다. ‘진박’ 수장이 광장에 꿇어앉아 표를 구걸하고 당 대표가 울산으로 쫓아내려가 노동자에게 읍소했지만 그것조차 쇼로 보였다. ‘무성이 옥새를 들고 나르샤’ 같은, 당을 희화화하고 정치를 코미디화하는 작태가 계속됐다.


이런데도 집권 여당이 중간평가에서 이긴다면 그건 기적이다. 어쨌든 선거는 끝났다. 정권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자칫 식물정부가 될 판이다. 아마도 의회는 세 정당이 어떻게 편을 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생물 국회가 될 것이다. 이걸 두고 황금분할이라고 할 것인가? 새누리당의 앞날은 정말 캄캄하다. 대권주자들은 하나같이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태연하다. 그들은 여전히 박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고 정국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을 재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기문을 데려오든 전장에서 쓰러진 장수가 권토중래하든 잘만 추스르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책상물림들 생각처럼 대중이 다시 마음을 바꿀까? 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데 걸겠다. 나부터 그들이 우리를 대변한다고 믿지 않은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의미는 이 나라 보수들이 새누리당의 집토끼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에서 새 등대를 볼 것인가?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272036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