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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병규 - 못 말리는 대통령

irene777 2016. 5. 31. 00:49



[세상읽기]


못 말리는 대통령


- 경향신문  2016년 5월 27일 -





▲ 백병규 

시사평론가



박근혜 대통령이 기어코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나섰다. 그것도 아프리카 3개국 순방 중에. 다른 법률도 아니고 국회 청문회에 관한 법이고, 귀국할 때까지 재의 요구 시한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해 다급하게 처리했다. 19대 국회 임기 만료를 이틀 앞두고서다. 19대 국회에서 재의 요구된 법률안은 19대 국회가 끝나면 자동 폐기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법리 논란을 염두에 둔 꼼수다.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에 이처럼 완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이른바 유승민 파동의 계기가 된 것도 바로 국회법 개정이었다. 시행령 등 정부의 행정입법이 본법의 취지에서 벗어나거나 어긋날 때 국회가 그 수정이나 변경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른바 ‘법령 하극상’ 현상에 제동을 걸자는 취지였다.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이는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과도한 통제라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또 야당과 합의해 준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해 ‘자기 정치나 하려 한다’며 결국 그를 원내대표직에서 끌어내렸다. 이번에도 거의 똑같은 논리다. 국회 상임위원회 현안에 대해서도 청문회를 열 수 있도록 한 것은 “행정부에 대한 견제가 아니라 통제를 위한 것”이라며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방대한 자료 제출 등 공무원의 업무 부담이 증대해 국정이 마비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동안 국회 청문회 때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고, 청문회가 빈번하게 열릴 경우 공무원들의 부담이 커질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요 현안에 대한 청문회가 정부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국정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억지다. 국회의 존재 이유는 정부를 ‘견제’하고 또 ‘통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3권분립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과도한 해석이자 현실에 맞지 않는 기우다.


그동안 한국의 국정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너무 집중되고, 국회가 견제와 감시라는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해 온 것이 문제였다. 국회가 정부를 과도하게 ‘통제’해서 문제가 됐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4·13 총선으로 여소야대가 됐다지만 야당이 청문회를 남발할 경우 여론의 역풍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소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고, 공무원들의 업무 부담도 늘어날 수 있지만 청문회의 예방적 감시 및 견제 효과 등을 감안한다면 보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국정운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에 대해 그렇게 완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정부의 공식 반응을 처음 대변한 이석준 국무조정실장의 발언에서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석준 실장은 국회법 개정안 반대 사유로 “정부 업무를 굉장히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며 “공무원들이 일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풍토를 해칠 우려”를 들었다.


정부가 정책을 펴고 예산을 사용하는 데 국회를 더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정부 업무가 ‘위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정상화’의 길이다. 처음부터 거리낄 게 없다면 위축될 이유도 없다. 문제는 공무원의 ‘소신’이다. 언제 공무원들이 소신 있게 일한 적이 있나? 오죽하면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이는 그래도 공무원들이 숨쉴 틈은 있었다고 하는 ‘참여정부’ 고위 공무원의 말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이석준 실장의 말은 “공무원 사회의 일사불란한 상명하복 풍토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으로 번역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통치권에 대한 그 어떤 추가적인 규제나 간섭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말에도 ‘번역’과 ‘통역’이 필요하게 됐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회’만 하더라도 번역기가 필요하다. 그 정확한 사전적 표현은 ‘입법부’가 아니라 ‘통법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말도 서로 통하지 않게 된 답답한 세태가 새누리당의 4·13 총선 참패 배경의 하나라는 것을 그는 아직까지도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또다시 ‘마이웨이’를 선언했다. 불과 보름 전 청와대에서 했던 여야 정치권과의 합의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박 대통령은 평화가 싫은 것 같다. 서로 불화하고, 갈등하고, 대립해야 자신의 입지가 있다는 판단 아니고서야 일을 이렇게 풀어갈 수는 없다. 누구 말처럼 ‘갈등’과 ‘대립’의 덫을 놓아 정치 하면 진저리치도록 국민들을 나가떨어지게 할 작정인지도 모른다. 못 말리는 대통령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72114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