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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해천 - 깨진 ‘중산층 신화’ 대체할 주인공, 여성

irene777 2016. 6. 1. 17:46



[별별시선]


깨진 ‘중산층 신화’ 대체할 주인공, 여성


- 경향신문  2016년 5월 29일 -





▲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조국 근대화”의 목표를 제시한다. 그것은 추상적 구호나 통계 수치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으로 제시된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가족의 삶이었다. “그때 국민 대다수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가족과 더불어 주말을 즐기며, 주부는 편리한 부엌을 갖춘 살기 좋은 주택에서 알뜰한 생활을 꾸밀 것이며, 자녀는 씩씩하게 자라고 슬기롭게 배워 세계에서 으뜸가는 한국인의 자질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이후 정권은 출생-교육-취업-결혼-출산·육아-집 장만-자녀 교육-부모 공양 등 사회 구성원이 수행해야 할 과업을 생애주기별로 배치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두 유형의 집단이 ‘국민’으로서 위의 과업 일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중산층 가족’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유형의 1세대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강남의 아파트 단지에 등장했던 1940년대생 대졸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명문고-명문대라는 학벌을 동력으로 삼아 대기업 관리직이나 전문직으로 성장하면서 현대적인 핵가족 모델을 완성해냈다. 두 번째 유형의 1세대는 대기업 사업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로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였다. 이들은 공고 졸업·직업훈련소 이수-취업·병역특례 등의 경로를 거친 후 동남 공업 지역을 거점으로 성장했고, 87·88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민중주의’와 결합시켜 중산층의 삶을 위한 경제적 여건을 마련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주했던 이 두 유형의 중산층 대다수는 봉건적 가부장제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극단적인 남아선호 현상으로 표출되기도 했던 가부장제의 혈통주의는 도시적 삶의 역동적 면모를 견뎌내기 위한 방패막이면서, 개인의 성취를 가족의 역사로 확장할 수 있는 서사적 장치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식의 중산층-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는 경제 성장의 뒷받침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도성장기가 저물자, 국가가 내건 과업의 목록은 역순으로 체념과 절망의 대상으로 변모했다. 아파트 가격 폭등과 양육비용 증대로 집 장만과 출산을 뒤로 미루거나 단념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저성장 시대의 본격화와 더불어 결혼과 연애와 취업을 차례대로 포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그저 중산층 진입의 불가능성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불가능성은 ‘국민’이라는 정체성의 불가능성과 곧바로 연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국민’이라는 호명을 받아들인 것은 중산층 양성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일정 정도 자기 삶의 비전으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목표의 부분적인 실현조차 국가가 보증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N포 세대”라는 명명법의 등장 직후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출현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헬조선”의 세계에서 비정규직은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젊은 세대는 극심한 취업난에 부표 없이 표류하며,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여성 혐오에 희생양으로 동원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세계에서 가부장제의 권력은 뭇 남성들이 동원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자원들 중 가장 강력하고 친숙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보다 7% 넘게 앞선 시대에 그 권력이 과거의 영광을 반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가부장제의 성역할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반감과 증오가 가시화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맥락들로 인해 젊은 세대의 여성들을 중산층 가족 모델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집단적 주체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사회적으로 확장해 간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국민 이후의 현대적 개인’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모색을 위한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92057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