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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선조와 이승만과 박근혜

irene777 2014. 9. 18. 04:18



[편집국에서]


선조와 이승만과 박근혜


- 한겨레신문  2014년 9월 17일 -





▲ 이제훈

한겨레신문 사회정책부장



조선은 일본과 ‘7년 전쟁’(임진왜란·1592년 4월~1598년 11월)으로 쑥대밭이 됐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고, 전답은 5분의 1로 줄었다. 기근과 역병이 산천을 휩쓸었다. 그 와중에 선조는 공신 책봉을 결정한다. “대대적으로 공신을 봉하니 명칭은 호성공신, 선무공신, 청난공신이다.”(<선조실록> 선조37년(1604년) 6월25일). 호성공신(扈聖功臣)은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따른 신하로 대부분 문관과 기술관이다. 선무공신(宣武功臣)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무인이다. 그런데 86명에 이르는 호성공신 중엔 말을 끄는 말구종도 6명 들어 있는데, 선무공신은 18명뿐이고 의병이 한명도 없다. 일본군도 그 기상을 기려 무덤을 만들어줬다는 동래부사 송상현, 칠백의사 조헌, 홍의장군 곽재우, 진주성의 김천일, 사명대사 등이 모두 빠졌다. 선조는 내뱉듯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 군사가 한 일이 뭐가 있소? 명나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라가 멸망했을 것이오.” 그러곤 ‘재조지은’(再造之恩·다 망한 나라를 살려낸 은혜)을 내세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송덕비와 생사당(生祠堂·산 사람을 위한 사당)을 지으라고 명했다.


선조가 재조지은을 앞세워 이순신과 의병을 폄하한 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자신의 무책임에 대한 왜곡된 자각, 무인한테 힘을 실어주면 왕권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판단 따위가 깔려 있었을 터. 하지만 재조지은 이데올로기로 스스로를 세뇌한 역사적 귀결은 병자호란이라는 또다른 재앙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1950년 6월27일 새벽 대전으로 ‘1호 피난’ 했다.(사실은 대구까지 도망갔는데 ‘너무 멀리 왔다’는 지적에 대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도 “서울을 사수한다”는 국군의 다짐을 라디오 방송으로 거듭 내보냈다. 이튿날인 6월28일 한국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당시 유일한 다리다.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이 500명 넘게 폭사했다. 이승만은 그렇게 한강 이북에서 인민군을 막던 병사와 시민을 버렸다. 심지어 그는 전쟁 발발 당일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해, 자신이 조직한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렇게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이 100만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4월16일 진도 앞바다가 세월호에 탄 304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정부는 스스로 빠져나온 승객을 빼곤 단 한명도 구하지 못했다. 대통령 박근혜는 선조와 이승만의 길을 좇아 자신의 무책임·무능을 ‘남 탓’과 ‘희생양 찾기’로 덮으려 한다. ‘유병언-구원파-청해진해운-세월호 선원’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성난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고심 끝에 해경 해체”를 선언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46일 장기단식과 함께 ‘성소’가 된 광화문광장의 동조단식, 그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외치는 수사권·기소권을 갖춘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등 세월호 특별법 제정 요구를 외면한다. 대신 “빨리 갑판 위에 올라가라는 말 한마디만 했으면 많은 인명이 구조될 수 있었는데”(9월2일 국무회의)라며 ‘선장 책임론’을 제기했다. ‘사라진 7시간’은 해명하지 않는다. 9월16일 국무회의에선 “순수한 유가족”이라는 말로 ‘불순한 유가족’의 존재를 암시한 뒤 “외부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덮어씌우기’에 나섰다. 하지만 세 치 혀로는 진실을 죽일 수 없다. 선조와 이승만처럼 그도 ‘역사의 복수’를 피해 갈 수 없을 터. 자연이 그렇듯이 역사도 자비를 모른다.



 - 한겨레신문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noma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