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펌>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 초동대처의 심각한 과실들

irene777 2014. 6. 12. 03:46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 초동대처의 심각한 과실들>

 

 세월호 침몰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 자세히 설명하고 분석해 놓아서 퍼왔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꼭 기억 하겠습니다...

 

 

 

 

 

 

출처 이니지오의 기억노트 | 이니지오
원문 http://inizios.blog.me/10189920245





 

2014.04.16

인천-제주 세월호 침몰



 

1. 07:08 - 진도VTS 관제중 관할구역내 세월호 교신 누락

 

- 세월호측에서는 VHF 공용채널 16번 채널(67번 메인채널 포함)을 꺼놓고 운행 중이었고 07시 08분경 진도VTS 관할에 진입하면서도 꼭 해야하는 진입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진도VTS 또한 AIS를 통해 세월호가 관제구역 내 진입을 알고도 진입여부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진도VTS에서 일반 어선도 아닌 대형 여객선 세월호의 진입여부도 몰랐다면 관제업무 과실이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 08시 48분 이후 세월호가 급격한 몇번의 변침 직후 좌우로 비틀대며 크게 느려지는 항적을 보였던 것과 잠시 AIS에서 사라지는 등 AIS 관제상 의심스러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진도VTS 관제사가 교신을 통해 직접 확인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때 교신만 되었어도 09시 06분이 최초교신시간이 되지 않았을테고 약 18분여의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을겁니다.

 



 

 

  

2. 08:52 - 최초 신고는 세월호 승무원이 아닌 단원고 학생

 



- 제일 먼저 세월호의 조난 상황을 해경에 신고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건 세월호 승무원도 아니고 진도VTS 레이더 관제사도 아니었고 단원고 2학년 6반 학생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세월호에서 제주 해경에 신고했던 08시 55분보다도 3분이나 빨랐던 때에 119로 전화를 걸어 해경과 3자 통화를 통해 신고되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해경은 일반인이 배의 조난을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도와 경도, 출항지를 물어보는 등 어이없는 대응으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래도 이 학생 덕분에 해경 경비정이 조금 더 빨리 출발 할 수 있었기에 174명의 소중한 생명이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 현재 최초 신고 학생은 24일 선미 부분에서 시신이 발견되어 장례 절차를 협의 중에 있으며 정부에서는 의사자 지정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3. 08:52 - 최초 신고 당시 단원고 학생들의 선내 모습

 

- 이번 사고로 희생된 故 박수현 군의 아버지의 요청으로 4월 29일, 박 군의 유품으로 발견된 핸드폰 메모리칩에 담겨있는 핸드폰 동영상이 공개되었습니다. 본 영상은 8시 52분 27초부터 09시 09분 23초까지의 학생들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10시 11분에 찍은 몇 장의 사진도 함께 들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박수현 군을 포함한 학생들은 온 몸으로 공포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분 단위로 계속되는 방송 지시를 따르려는 의지를 보입니다. 또한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엄마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친구들의 마지막 말을 담으려는 노력도 보입니다. 방송에서 말 한 대로 구명조끼를 찾아 입고 있었으며 선체 밖에 있는 친구들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때 세월호는 아직 조난 신고도 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있었던게 역력히 드러납니다. 10시 11분에 찍힌 사진은 선체가 90도 가까이 기운 상황인데도 방송에 따라 여전히 선내에 대기 중인 모습의 학생들이 담겨 있습니다.

 

* 4월 29일 전체 영상이 공개된 박군의 핸드폰 영상 보기 - http://youtu.be/zPbnODd1Wjc

 

 

 

4. 08:55 - 최초 버려진 11분

 

- 제주VTS 최초신고 08시 55분과 진도VTS 최초교신 09시 6분까지 약 11분 낭비

 

- JTBC 항해사 인터뷰에서 밝혀졌지만 공용채널(진도VTS와 교신가능한) 16번채널이 아닌 12번채널(제주VTS 채널)로 교신한 선장 및 항해사들의 직무과실

 

- 하지만 제주VTS에서 목포해경으로 신고가 접수(08:58)되고 다시 진도VTS로 이관되는데 10여분이나 소요되었다는것은 해경과 해수부의 직무과실로 판단됩니다.

 


   

  

5. 09:03 -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낀 승객들

 

- 단원고 연극부 학생의 카톡을 보면 제주VTS와 교신중이던 09시 03분 침몰 초기부터 이미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09:05 - "방으로 가세요! 방으로 가세요~!"

 

- 08시 55분 ~ 09시 05분 사이에 제주VTS와의 무전중에 잡힌 음성을 잘 들어보면

   "방으로 가세요", "방으로 가세요~!" 라는 두번의 목소리가 잡힙니다.

  선내 방송이 실수로 무전에 잡힌 것으로 보이는 녹음입니다만 계속해서 방으로 돌아가라고 방송중이었습니다. 이때 이미 선내 일부 승객들은 위험을 일부 감지하고 외부 갑판으로 대피중이었습니다. 이를 말리기 위해 선내 방송을 통해 집중적으로 '객실내 대기'를 지시했고 이를 어기고 미리 좌우현 갑판과 선미 갑판에 대피해있던 승객들은 09시 29분 ~ 10시 10분 사이 약 40여분간 헬기와 해경 구조선 및 어선들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7. 09:10 - 한발자국도 움직이기 불가능한 상태였다?

  

 

- 제주VTS 교신때 한번 그리고 진도VTS와의 교신에서  09시 10분~18분동안 수차례에 걸쳐 선내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기울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신체적으로 더 열악한 3층의 식당 근무자들은 5층(조타실도 5층) 선미 갑판으로 대피하고 있었고 3층에 모여있던 기관직 승무원들 7명은 4층 좌현 갑판으로 대피해 퇴선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후에도 '선내 대기' 방송을 거스른 일부 승객들은 우현 및 선미 갑판으로 이동 및 대피했기에 탈출이 가능하였습니다.

  그 후 더욱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탈출을 했던 조타실 승무원들의 모습을 미루어볼 때 탈출 전 충분히 좌현쪽 구명벌을 풀거나 해난 탈출용 보트 또는 비상사다리를 준비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됩니다.

 

  

 

8. 09:14 - 조기 탈출한 보트(구명벌)는 무엇인가?

 

 

- 진도VTS의 협조요청으로 접근중이던 둘라에이스호(유조선)에서 교신한 무전 내용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09시 14분에 탈출한 보트는 구명벌로 예상됩니다만 과연 누가 탈출한 것인가가 의문입니다.

  여러 장의 사진으로 확인해본 결과 좌우현 구명벌은 모두 그대로 붙어있습니다. (해경이 떨어뜨린 두개의 구명벌 제외) 

 


- 단 좌현 5층 갑판 객실쪽(VIP실, 2등실) 지붕으로 덮여있는 복도(녹색 원)에도 구명벌이 2개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그 구명벌이 사용되었는지는 어느 동영상에도 사진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승무원이 사용했다면 조타실 좌우현에 붙어있는 가까운 구명벌을 놔두고 왜 좌현 뒷편 구명벌을 사용했는지 의문이 생기며, 물론 승객이 사용해 탈출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사용되어진 구명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둘라에이스호 선장의 착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해경이 4월28일 공개한 123정 구조영상을 참고하면 지붕에 가려진 좌현 객실쪽 구명벌은 원래 대로 두개 모두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9. 09:14 - 주변 선박 호출에만 급급했던 진도VTS

 

- 둘라에이스 "좌현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접근이 위험합니다" (09:14)

 

 

- 둘라에이스호는 구글링해보니 유조선입니다. 이런 대형 선박은 이미 기울어진 여객선에 접근해 구조활동을 펼치기에 이미 늦었다는 것을 위 무전 교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고 당시 접근한 둘라에이스호(유조선, 09:14 현장 도착), 드래곤에이스11호(화학물질 운반선선, 09:30 현장 도착 - 우현쪽에 퇴선 인원 한 명도 없었다고 함)등 대형 선박들은 모두 세월호 몇 십미터 밖에서 근접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도VTS에서 요구한 대로 구명벌이나 각종 구호장치를 세월호 인근에 투하하지도 못했습니다. 만약 진도VTS에서 바라는 대로 대형 선박이 인접해 이선(배에서 배로 이동)을 통해 인명을 구조하려면 세월호가 바로 서 있거나 주변에 부유물이 없는 상태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이 당시 펼칠 수 있는 구호 방법은 퇴선밖에는 없었습니다. 배에 탄체로 이선이나 구조된 인원은 09시 35분~40분경 3~4층 좌현 갑판에 대피했던 일부 승객과 조타실에서 탈출한 조타실 선박직 직원들 10여명 정도이며 09시 29분경 첫 도착한 헬기에 의해 우현 4~5층 갑판에 미리 나와있다 구조된 인원들 20여명뿐입니다. 이때 쯤이라도 퇴선 명령을 태렸다면 구명벌이나 기타 인근 대형 선박 및 어선들에 의해 상당 수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위 둘라에이스호의 선장의 대답도 "승객들이 탈출하면 구조하겠습니다" 라고 답했는데 막상 탈출을 안하니 손을 쓸 수도 없었다고 사고 이후 둘라에이스호의 선장이 직접 인터뷰한 바 있습니다.

 

  선장이 퇴선 명령을 내리더라도 이때쯤 내렸어야 하며

  진도VTS에서도 이때쯤부터 퇴선을 강하게 지시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 09:14 진도VTS "세월호, 현재 승객들이 탈출이 가능합니까?" / 세월호 "배가 많이 기울어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이때 판단했어야 합니다. 이때까지의 무전을 통해 진도VTS가 인지한 사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승객이 500여명 타고 있다.

  2. 탈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배가 이미 많이 기울고 있다.

  3. 부유물과 기울기로 대형 선박을 이용한 구조는 이미 늦었고 매우 힘들다.

  4. 둘라에이스호는 9:23 세월호 접근이 불가하다고 전하고 '침몰 직전'이라고 경고.

 


- 이때 승객을 가능한 많이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구명동의 착용 후 퇴선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10여분이 지난 09시 23분, 진도VTS는 경비정 도착예상시각과 구명동의 착용만 지시할 뿐 퇴선지시를 하지 못합니다. 이때 세월호에선 '경비정이 15분 후면 도착하니 승객들에게 구명동의를 착용시키고 대기하라'라는 정도로 받아들였을 듯한 무전내용입니다. 결국 09:14~09:23 9분동안 주변 선박 호출과 무선교신으로 가장 중요했던 골든타임을 그렇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사고 직후 방송사 인터뷰에서의 생존자 증언 모습. 배가 기울었을 때도 어느정도 탈출은 가능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08:55~09:38 무전 교신이 계속되던 중 언제라도 적극적인 퇴선 지시가 있었다면 선내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생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외국 선박 전문가도 "배가 20도 정도 기울면 승객들을 대피시켰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즉 배가 심하게 기울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부터 진도VTS는 경비정 도착 여부를 떠나 세월호에 대피나 퇴선에 대해 강하게 요구했어야 합니다.>

 

 

 

10. 09:21 - 정신없는 세월호 승무원들

 

- 09시 21분 "해경이 구조차 오고있습니까? 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항무제주 세월호 감도 있습니까?"

 

 

- 이때의 세월호 교신을 보면 제주VTS 채널인 12번/21번 채널이 아닌 공용채널인 16번 채널에서 제주VTS에게 감도 여부를 묻고 있습니다. 09시 5분 무전에 대고 선내 방송을 했던 것도 모자라 공용채널에 항무제주 감도를 묻는 등 당시 조타실 상황이 매우 정신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 09:23 - 정말 선내 방송이 불가능했을까?

 

 

- 09시 23분 진도VTS의 방송지시에 세월호는 방송이 불가능한 상태라 답합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증거는 09시 5분 무전에 있습니다. 위 09시 5분 제주VTS와 무전 도중 실수로 선내방송이 무전에 잡힙니다. 무전 중에 선내방송이 잡힌건지, 경황이 없어 무전기에 대고 선내 방송을 했는지는 몰라도 무전기와 선내 방송용 기기가 매우 가깝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습니다. 즉 무전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선내 방송도 가능하다는 증거입니다. 참고로 10시 넘게 방송했던 사무원은 조타실이 아닌 3층 안내실에서 방송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2. 09:25 - 진도VTS의 책임 미루기

 

- 09시 25분 "세월호, 인명탈출은 선장님이 직접 판단하셔서 인명탈출 시키세요

   저희가 그쪽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선장님께서 최종판단을 하셔서 승객 탈출 시킬지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 퇴선 지시를 했어도 진작에 했어야할 진도VTS는 탈출을 주저하며 구조선이 언제오냐고만 재차 묻는 세월호를 향해 '선장의 최종 판단 하에 탈출 여부를 결정하라'고 떠넘깁니다. '판단'이란 것과 '결정'이란 것은 선택지가 있을 경우에나 적합한 말일텐데 당시 상황으로는 여러모로 봐도 퇴선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저때 진도VTS가 했어야 할 말은 선장의 판단이나 결정을 지시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 및 결정을 해서 퇴선을 종용했어야 합니다. 이후에도 진도VTS는 세월호와 교신이 끊기는 09시 38분까지 퇴선 상황 확인이나 재촉이 아닌 주변 대형 선박과의 교신에 주력합니다. 하지만 대형 선박을 이용한 구조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전세계 대부분의 VTS 관계 법에 따르면 VTS는 선박의 선장에게 퇴선을 명령할 수 없으며, 선장이 VTS의 통제를 따르지 않더라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다고 합니다.(일부 국가 제외)

  

 

 

13. 09:27 - 당시 선내 객실 상황

 

- 첫 헬기가 도착하기 직전 대부분의 승객들은 50~60도 가량 기울어진 선내에서 중심을 잡으며 대기중이었습니다.

 

<09시 22분에 실종된 학생이 오빠에게 보낸 카톡 문자와 당시 선내 사진>

 

<촬영시각이 09시 27분으로 찍힌 생존자의 당시 선내 동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v=xxc8msCV-Ps >

 

- 또한 그 즈음 다른 학생도 무시 못할 위기감을 느꼈는지 지인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14. 09:29 - 첫 해경 헬기 도착

 

<09시 30분경 현장에 도착한 드래곤에이스11호의 촬영 영상에 잡힌 해경의 첫번째 도착 헬기>

    

  

- 09시 29분 교신내용에 둘라에이스호에서 헬기 목격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봐서 첫 헬기 도착은 09시 29분입니다.

  제일 먼저 헬기가 도착했을때는 이미 세월호가 좌현으로 55도 정도 기운 상태였으며 선미나 우현 갑판에 대피한 사람이나 바다로 뛰어든 퇴선 인원이 전혀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구명벌도 없습니다. 당시 이 상황을 헬기에서 해경에 최초 보고했는지 의문입니다. 만약 보고했더라면 세월호의 심각성(선체 기울기, 대피 및 탈출 상황)을 인지하고 해경측에서 진도VTS를 통해 세월호에 더 빨리, 더 강하게 대피나 퇴선을 종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해경 초동대처의 문제점 1. - 최초 도착 구조대의 상황보고 부재)

 

<첫 헬기가 도착한 시각(09:29)의 세월호는 약 55도의 기울기(각도기로 측정)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때까진 선수 갑판에 컨테이너가 아있었지만 나머지 컨테이너들이 바다로 떨어지면서 세월호는 더 급격히 기울고 침수되기 시작합니다. 선수 좌 상단 부분에 무전 교신내용에 나온 빨간 탱커 '둘라에이스호'가 보입니다>

 

- 둘라에이스의 헬기 확인 이전에 세월호의 무전에서 "선수 쪽 말고 좌현에 대기 해주라고 하십시오"라는 교신 내용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매뉴얼 대로라면 기우는 방향의 반대인 우현쪽으로 퇴선해야 맞지만 기울기가 너무 심한 까닭인지 둘라에이스호에게 좌현 방향에 대기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퇴선할 경우 좌현으로 탈출하겠다는 이야기인데 선장을 비롯한 조타실 인원들이 탈출하던 09시 45분 경 4층 갑판까지 물에 잠겼으므로 09:30~09:45 까지 약 15분 동안 퇴선이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15. 09:30~ - 첫 생존자 구조 및 5층 우현 갑판 생존자들 구조

 

- 첫 헬기가 세월호 현장에 도착한 후 배를 천천히 반 바퀴 이상 선회하며 현장 상황을 확인한 해경 헬기는 5층 우현 갑판에서 몇 명의 생존자들을 발견하고 최초 특수 구조요원들을 낙하합니다. 두명의 구조요원을 낙하한 후 헬기에 탑승시키기 용이하도록 난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도운 후 첫 생존자를 호이스트(구조용 바구니)에 태웁니다. 이때 09시 35분 헬기 및 구조선을 통틀어 구조된 제일 첫번째 생존자는 우현 5층 갑판 뒷쪽으로 미리 대피해있던 식당 아주머니였습니다.(두번째 생존자는 조리장)


<세월호 침몰 당시 첫번째 생존자였던 3층 식당 아주머니. 카라와 소매의 핑크색이 선명한 반팔 유니폼이 보입니다> 

 

- 선박직 승무원 15명 외에 선내 사무원(서비스직) 다섯명 중 1명과 조리부 직원 네명 중 2명이 구조되었는데 당시 세월호 비상 매뉴얼엔 조리부 직원들도 먼저 탈출하는게 아니라 사무원들과 함께 승객들의 대피를 돕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첫번째, 두번째 생존자가 조리장을 포함한 조리부 승무원이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란 것은 무너진 주방 안에 다친 채 갇혀 있는 동료들을 위해 구명조끼를 가지러 가던 중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식당은 3층, 구조받은 곳은 5층 우현 갑판입니다. 그분들의 동료 두 분은 식당에 갇혀 아직도 동료들이 가지고 올 구명조끼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이때까진 하늘쪽으로 향해있던 우현 갑판에 대피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하지만 헬기소리를 들은 승객들이 조금씩 늘어나 우현 갑판 난간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이 인원들은 배가 기울어지던 초기에 각 층에서 미리 우현 갑판으로 대피해 있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배가 이미 60도 이상 기운 상태였으므로 추가로 선내에서 나와 우현 갑판으로 대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당시 "객실 내에 대기하라", "해경 구조대가 오고 있으니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라" 라고 지속적으로 선내 방송을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원(주로 학생들)은 아직도 선내 객실에 대기중이었습니다.

 

  

 

16. 09:35 - 해경 경비정(목포해경 123정) 현장 도착

 

-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출동 명령을 받고 경비정이 출발한 시각은 08시 57분 경, 그리고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09시 30분입니다. 하지만 09시 29분에 세월호 침몰 현장에 도착했던 첫번째 헬기의 영상엔 해경 경비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현장엔 진도VTS와 세월호 간의 무전에 나오는 '두라에이스호'만이 보일 뿐입니다. 실제 목포 해경 헬기에서 촬영된 영상을 참고해 보면 해경 경비정이 도착한 시각은 09시 35분경으로, 해경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비정이 09시 30분에 현장 도착했다'는 것은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해경이 공개한 헬기영상은 네번째 영상에서부터 세월호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파일의 촬영 길이는 2분 49초, 이 파일의 1분 경 쯤 세월호 상공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영상은 공파일이며 6분 3초 분량의 6번째 영상의 4분 25초 부분에서 목포 해경 소속 123정이 긴 물살을 남기며 접근하는 모습이 아주 잠깐 보입니다. 해경이 편집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두 시간을 합치면 약 6분14초 정도의 간극이 생깁니다. 즉 경비정은 해경의 첫 헬기가 도착한 09시 29분보다 6분14초 늦게 도착한 것입니다. 따라서 해경 경비정이 도착한 정확한 시각은 09시 35분경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09시 35분 경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고무보트(단정) 한대를 내린 후 고무보트는 좌현 3~4층 갑판의 대피 및 탈출 승객들 10여명을 구조하고 123정은 곧바로 조타실 구조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장에 첫 도착한 해경 헬기가 우현 5층 갑판에서 첫 생존자를 호이스트로 올려 막 구조하던 찰라 창 밖으로 해경 123정이 긴 물살을 그리며 세월호 선수 앞쪽 좌현 방향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잡혔습니다.(해경 헬기 촬영파일 6번째 영상의 4:25 부분) 4월 28일 목포 해경 123정의 촬영 영상 공개로 첫 도착 시간이 실제 9시 35분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첫번째 헬기에서 찍은 사진에 경비정 모습이 잡혔을 때 쯤의 123 경비정에서 찍은 사진입니다(위 사진을 촬영한 경비정의 위치). 경비정이 최초 도착했을 때는 3층 갑판으로의 탈출에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17. 09:38 - 해경 경비정이 첫번째로 구조한 생존자들

 

- 4월 28일 이전까지는 123정의 구조 영상이 공개되지 않아 조타실 구조 전 후 어떤 구조상황이었는지 파악되지 않았으나 영상 발표 후 확인된 사항을 추가 합니다.

 

- 해경 경비정이 09시 35분경 세월호 현장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한 것은 약 3분에 걸쳐 고무보트를 내린 후 좌현 갑판에 대피한 생존자들을 구조한 것입니다. 조타실 인원을 구조하기 전 약 10분에 걸쳐 세번을 왕복해 11명을 구조를 하게 됩니다. 그 장면들을 사진과 함께 설명을 해봤습니다.

 

<09시 35분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고무보트(단정)를 내려 3층 갑판을 향해 갑니다. 그리고 경비정 도착 후 최초로 3층 좌현 갑판에서 5명의 승객을 구조합니다.>

 

<123정이 구조한 최초의 생존자들 다섯명을 고무보트에 태우고 123정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다섯명을 123정에 옮겨 태운 후 다시 바다로 탈출한 승객을 태우러 갑니다.>

 

<바다로 탈출한 승객 한명을 구한 후 연이어 4층 갑판에 대피 중인 승객 세명을 구조하는 장면입니다. 최초 해경은 123 구조정의 일반 승객 구조 사진을 이 장면만 공개했었습니다.>

 

<123정의 고무보트가 좌현 갑판에 대피중인 승객들을 구조하던 때 조타실에선 이미 조타수로 보이는 승무원이 나와 탈출을 위한 구명줄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최초 공개되었던 조타실 탈출 장면에서 구명벌을 풀던 해경(위 사진 빨간 박스)은 고무보트로 미리 3층 갑판으로 승선하여 계단을 통해 5층 갑판으로 올라왔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저때 승무원들의 이동에도 큰 무리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측 파란 박스를 보면 해경은 고무보트로 두명을 추가 구조하고 있습니다. 이 쯤에서 해경 123정이 조타실 좌현에 배를 근접시킵니다. 이 때까지 현장에 도착해 고무보트를 내리고 3회에 걸쳐 총 11명의 생존자를 구조했으며 현장 도착 후 약 10분 정도가 소요되었고 이후 조타실에 배를 댄 시각은 9시 45분이었습니다.>

  

 

 

18. 09:44 - 해경은 왜 구명벌 두개만 풀었을까?

 

- 경비정에서 내린 고무보트로 좌현 갑판 구조 중 3층 갑판으로 올라간 해경 한 명은 5층으로 올라가 조타실 쪽으로 접근하며 구명벌을 뒷 쪽부터 풀어보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조타실 바로 앞 두개만 푸는데 성공합니다. 구명벌은 한개의 무게가 300kg 이상이어서 배가 45도 이상 기운 상태에서는 무게 때문에 작동 레버를 당기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힘들게 겨우 푼 두개의 구명벌도 즉시 터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구명벌은 낙하되는 충격과 수압에 의해 터지는데 저렇게 높이가 낮은 곳에서 터트릴 때는 수동으로 터트렸어야 합니다. 

 


- 세월호에 탑재된 총 44개의 구명벌은 모두 25인승으로 유사시 1천명 이상의 사람을 태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가 좌현쪽으로 기운 상태라 우현쪽 28개의 구명벌은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좌현쪽 16개의 구명벌만 모두 터트리고 승객들을 퇴선시켰을 경우 최대 400명까지 태우고 구조대를 기다릴 수 있는 수였습니다. 단 구명벌은 구조상 바다에 떨어지면서 터지는 방식(구조정은 배에 사람을 태운 채 바다로 하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일단 승객들이 바다로 퇴선하면서 터뜨려야 구명벌에 오르기가 용이했을 것입니다. 이 밖에 구명벌이 쇠줄로 묶여있어 풀기가 어려웠다거나 정비하는 과정에서 안전핀에 페인트가 굳어 작동시키기가 어려웠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 하지만 조타실 승무원 11명 중 어느 누구도 나가서 구명벌을 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해경이 배에 올라 구명벌을 풀 때 어떤 승무원도 돕지 않았습니다. 구명벌을 작동했다는 가정 하에 퇴선 순서를 보면 즉 순서는 '갑판 대피'를 방송한 후 '구명벌 투하' 및 '비상사다리 설치' 후 '퇴선 및 탑승' 또는 5층에 장착된 4개의 '해상 탈출 보트'를 펼친 후 '퇴선'이었을텐데 승객들이 퇴선하기 가장 좋은 상황(배가 좌현으로 기울어 낙하높이가 낮아 / 단 매뉴얼상으로는 가라앉는 반대편인 우현으로 비상사다리를 통해 퇴선해야 함)인 09:00~09:38 약 40분간의 상황을 진도VTS와 교신하느라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09시 40분 이후 좌현 갑판 5층까지 물이 넘치면서 퇴선은 세월호 선미 갑판과 우현 갑판으로만 가능한 상태였습니다만  그땐 이미 급격한 선체 각도(당시 약 70도)로 인해 다른 이들의 도움(생명줄 등) 없이는 외부 갑판으로 나오기가 힘들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19. 09:44 - 구명벌(팽창식 구명뗏목)은 정말 터지지 않았을까?

 

- 대부분 저 해경이 떨어뜨린 구명벌 두개가 터지지(펼쳐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정상이라면 바다에 떨어지자 마자 터지며 보트 모양으로 펼쳐져야 맞지만 배가 좌현으로 55도 이상 기운 까닭에 낙하 충격이 크지 않아 바로 펴지지 않고 약 십여분 후 자동으로 펼쳐집니다. 하지만 구명벌은 낙하 충격의 수압이 아니더라도 직접 수동으로 펼칠 수 있습니다. 펼쳐진 구명벌 중 하나는 세월호가 거의 가라앉기 직전까지 선수 쪽에 맴돌고 있었으며 하나는 일찌감치 멀리 멀리 흘러 갔습니다. 실제로 세월호의 구명벌은 일본에서 중고로 배를 들여올 때 부터 장착되어 있던 것으로 일본 기업이 만든 제품이며 2012년과 올해 2월 선원들이 작동 교육을 받으며 시연할 때도 정상적으로 작동되던 것들입니다. 즉 실제 가용한 구명벌들이었 퇴선이 이루어졌더라면 다소 늦게 터지는 한이 있거나 수동으로 펼치는 한이 있더라도 생존자들은 구명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첫번째 사진의 좌측 큰원의 구명벌이 먼저 해류를 타고 일찌감치 멀어진 상태에서 우측 작은원의 두번째 구명벌이 뒤늦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뒤에 펼쳐진 구명벌은 해경 경비정의 와류때문에 해류를 타지 못하고 세월호가 침몰할 때 까지 계속해서 선수 쪽에서 맴돌았습니다. 두번째 사진의 구명벌이 뒤에 터진 구명벌 모습입니다. 세번째 사진에 멀리 흘러간 구명벌과 선수 쪽에 맴돌고 있는 세월호 구명벌이 보입니다.(해경 헬기에서 떨어뜨린 구명벌은 노란보트에 지붕이 주황색의 10인용)>

 

  

 

20. 09:44 - 퇴선 장비는 구명조끼와 구명벌 밖에 없었을까?

 

- 세월호에는 가장 필수적인 구명조끼가 성인용 960개, 어린이용이 102개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의 구명벌(Life Raft)이 25인용 44개(1,100인용), 그리고 자동으로 에어미끄럼틀이 펼쳐지면서 바다에 커다란 보트가 펼쳐지는 '해상 탈출 보트(슈터)' 250인용 4개,  라이프링(구명부환) 6개, 바다에 펼쳐진 구명벌을 향해 안전히 바다로 퇴선할 수 있는 20M짜리 '승정사다리'도 2개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조난이나 표류시 현 위치를 알릴 수 있는 각종 비상 신호장치들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 이번 사태와 같이 빠르게 침몰하거나 큰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빠른 퇴선'이 관건인데 세월호엔 이런 빠른 퇴선을 용이하게 도와주는 해상 탈출 보트가 조타실이 있는 5층에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즉 모든 승객들을 미리 5층 갑판으로 대피시켰다면 비상시 승무원들이 작동시킨 에어미끄럼틀을 이용해 미끄러져 250인용 대형 보트 네개에서 안전하게 구조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구명벌도 44개 전부 조타실이 있는 5층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비상 탈출 장치들의 위치, 작동 방법은 승무원들만이 숙지하고 있었는데 5층 조타실의 선박직 승무원들 모두가 조기에 탈출한 것이 이번 비극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노란색 박스안의 사각형 장치가 바로 비상 탈출용 에어 미끄럼틀 + 250인용 팽창식 뗏목입니다. 5층 조타실 뒷쪽 갑판의 좌우현에 각각 2개씩 총 4개가 장착되어 있어 동시에 1천명을 퇴선시킬 수 있습니다. 윗사진-좌현, 아래사진-우현>

 

<위 비상탈출용 에어 미끄럼틀이 펼쳐지면 위 사진과 같은 모양으로 팽창하면서 250인용 보트가 만들어집니다. 미끄럼틀을 이용해 빠르게 해상으로 퇴선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1개당 250명을 구할 수 있어 세월호 사고 초기 좌현쪽의 두개만 작동시켰어도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4월28일 해경이 공개한 123정 구조 영상 추가 사진

 

<목포해경 소속 123정이 현장에 최초 도착했을 때(09:35)의 영상을 보면 5층 갑판에 두개의 해상 탈 출 보트(슈터)가 선명히 보입니다. (두번째 사진 빨간 박스) 저 때 슈터 두 개를 작동시키고 모든 승객을 해상 탈출 보트에 탑승 시켰다면 전원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21. 08:55~09:45 - 약 50분여의 시간동안 선장 및 승무원들은 무엇을 했나

 



- 선장과 승무원들은 배에 이상상황 발생시 제일 우선해서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언론에서 지적했듯이 선장을 포함한 선박직 승무원들은 승객들 보다도 우선해 배에서 탈출한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어 왔습니다. 배가 심하게 기울어 선내 각 지정 위치에서 대피활동을 돕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적어도 방송으로라도 상세히 선내 대피를 도왔어야 하며 좌현측 구명벌이라도 작동가능하도록 풀어놨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만 제대로 실시하고 탈출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대형 인명 손실도, 원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 언론에 알려진바와 같이 사고 당시 조타실이 아닌 기관실이나 선원실에 있던 선박직 승무원들 15명은 선내 3층 선원실 근처에 대기하다 일부는 조타실로 올라와 해경 경비정으로 탈출하고 일부는 3층 갑판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승객들의 대피를 돕지는 않았습니다.(위 도표상에서 갑판의 구명보트로 탈출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경 헬기에서 투하된 구명벌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조타실에 대기했던 인원들 또한 무전이나 선내 방송에만 집중 했을 뿐 별도의 승객 대피 준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5명의 사무원들은 1명을 제외하고는 선박직 승무원들 처럼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리부 근무자들 중 두명은 주방 안에 갇힌 동료 두명을 위한 구명조끼를 가지러 간다며 5층 갑판으로 올라가 제일 먼저 구조되었습니다.

 

- 조타실 승무원들의 경우 무전이 끊긴 09시 37분 부터 123 경비정으로 탈출을 시작하던 09시 45분까지 8분 가량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차후 검찰 조사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2. 09:45 - 해경 123 경비정이 구조한 생존자들

 

- 해경 경비정이 09시 35분경 세월호 현장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한 것은 약 3분에 걸쳐 고무보트를 내린 후 좌현 갑판에 대피한 생존자들을 구조한 것입니다. 약 세번을 왕복해 11명을 구조한 직 후 배를 댄 곳은 조타실 앞입니다. 당시 조타실엔 약 11명의 선박직 승무원들(선장, 항해사 4명, 조타수 3명, 기관사 3명)이 대기중이었고 그들 대부분(8명)이 이 경비정을 타고 탈출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일부는 청해진해운 유니폼을 입은 상태로 구조되었습니다.

  아무리 대형 해난 사고였고 급박한 상황이라 누가 누군지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각종 해난 사고에 출동하여 구조와 사태 수습을 반복하는 해경이라면 일반인과는 다른 조치와 매뉴얼적인 대응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저 '급하니까 보이는 대로 일단 구조하고 보자' 라는 일반인 마인드의 단순한 생각이라면 아무런 훈련과 교육이 없는 어민이 구조하는 것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배의 핵심기능을 담당하는 승무원이 모여있는 조타실이었다는 것,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일부 있었다는 것, 갑판 대피 인원 확인이나 구명벌 작동 여부 파악 등 수 많은 훈련과 다양한 해난 상황을 접하는 해경이라면 충분히 구분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 여기서 해경 초동대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위에서도 가장 먼저 도착한 헬기가 배의 상황(배가 기운 각도에 비해 탈출하거나 갑판에 대피한 인원이 너무 적은 점)을 보고하지 않았던 것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경비정에서는 조타실 구조 활동과 함께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어야 합니다. 한 명은 배에 올라 구명벌이나 구명장치들의 작동여부 확인하고 한 명은 배에 올라 조타실 탈출을 돕고 한 명은 경비정 선수에서 배로 건너오는 생존자들을 안전하게 잡아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뭘 하고 있었던걸까요? 한대의 경비정(100톤급)에 최소 10명 이상의 근무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실제 123 경비정 승조원은 14명이었습니다.) 두명은 조타와 무전, 한 명은 구조장면 촬영 임무라 사진상에 나와 있지 않았겠지만 사진에 촬영된 해경 인원만 총 5명입니다. 세월호에 올라 탄 두명의 해경을 제외하고 경비정 선수에만 3명이 모여 이선하는 생존자들(승무원)을 돕고 있는데 이 중 한두 명이라도 더 배에 올라 조타실 상황을 파악했었거나 아니면 이선 완료한 생존자들에게 세월호의 승객 조치 상황, 선내 상황을 신속히 확인했어야 합니다. 

(해경 초동대처의 문제점 2. - 초기 상황파악 미숙 및 승무원 우선 탈출 방조)

 

- 위 사진의 파란 원을 보면 구조시, 조타실을 통해 조타실 승무원 뿐만이 아니라 일반 승객도 구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타실과 선원실 뒤로 VIP실과 2등실에 일부 단원고 선생님들이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중 일부가 조타실을 통해 승무원들과 함께 탈출한 것 같습니다. / 4월 28일 검찰조사로 압박을 받던 해경이 공개한 123정 영상을 참고하면 저 맨다리의 정체는 이준석 선장이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신발도 없이 팬티 차림에 탈출을 시도하는데 앞서 내리는 여승무원을 제치고 경비정으로 올라타는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4월28일 공개된 해경 123정의 영상 중, 조타실 탈출이 9시45분부터 시작되고 49분경 해경 한 명이 밧줄을 잡고 조타실 입구로 올라가 조타실 내로 들어가는 모습이 잡혔습니다. 하지만 해경은 조타실 입구에서 탈출하는 승무원들을 도와주기만 했을 뿐 조타실 내로 진입해 선내 방송을 하지 않았고 바로 경비정으로 돌아와 세월호를 떠났습니다>


 


- 해경 경비정의 현장 도착 초기, 조타실 구조 당시 좌측의 노란 박스에 보이는 창문은 4층 선수 부분의 80인실인데 당시 단원고 2학년 남학생 7반과 8반 50여명이 머물던 곳입니다. 만약 해경 경비정이 도착하자마자  저곳의 창문을 깨고 진입하거나 승객들의 탈출로를 마련해 줬더라면 선체가 기울어져 중앙부 우현 갑판으로 탈출이 불가능했던 근처 객실까지 포함해 약 80여명의 학생들을 더 구할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의 학생들은 대부분 4층 객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선체가 크게 기운 상황에서 선수 부분 객실들은 배 중앙 계단홀을 통해 우현 갑판으로 70~80도의 절벽을 올라와야만 탈출이 가능(보라색 점선 화살표-하지만 당시 우현 갑판으로 향하는 통로는 수직 절벽으로 변해 탈출 불가능)했는데 만약 선수 쪽 객실의 창문을 깰 수 있었다면 저 80인실 객실창을 통해 대부분 탈출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 사진 추가 

<4월 25일 팩트TV를 통해 학부모의 요청으로 공개된 위 80인실의 오전 09시 40분 직전 상황입니다. 위에서 노란 박스로 표시한 부분이 위 핸드폰사진의 빨간 박스에 해당하는 창문입니다. 파란 박스에 해경 경비정으로 탈출하는 승무원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저때 저 창문 한개라도 깰 수 있었다면 저 객실과 인근 객실 학생들까지 모두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 4월 26일 현재까지 위 80인실에서 24구의 시신이 수습되었습니다. T_T

 

<해경 경비정이 조타실 승무원들을 모두 태우고 선수 인근에서 대기할 즈음 좌현 4층 갑판에서 10여명의 생존자가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중 7명을 향해 해경 헬기에서 구명벌을 투하했습니다. 그때 텅 빈 줄 알았던 조타실에서 2명의 생존자가 내려와 아직 터지지 않은 한개의 구명벌을 향해 바다에 뛰어 듭니다. 5층 갑판에 매달려 있던 세명의 생존자는 조타실 입구까지 매달려가 조타실 추가 탈출 인원 2명과 함께 해경 고무보트(단정)에 구조됩니다.>

 

검찰 조사에서 기관사 등 7명의 선박직 승무원들이 침몰 초기 좌현 갑판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조타실 구조와 동시에 좌현 갑판을 통해 탈출했던 인원들은 위 사진의 10명이 전부입니다. 저 10명이 구조된 후인 09시 54분 경 좌현은 5층 갑판 지붕까지 물에 잠겼으므로 더 이상 좌현 갑판으로의 탈출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 10명 중 7명이 조사에서 밝혀진 기관직 승무원들이라고 추정되는데 전원 해경 헬기에서 투하한 구명벌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조타실에서 추가 탈출한 2명 또한 초기 구조시 경비정에 타지 않았던 마지막 선박직 승무원이라 추정됩니다.

 

 

- 09시 45분 이후 해경 경비정이 모든 선박직 승무원들을 태우고 세월호를 떠났기 때문에 무전도, 방송도 불가능해졌으며(선내 안내실에서 사무원의 방송은 가능) 승객 대피를 도울 인원은 단 5명의 사무원(서비스직)들만 선내에 남게 됩니다.(식당에 남아있던 조리원 2명은 부상으로 식당 내 고립 상태)


<아직 좌현 3층 갑판으로 물이 넘치기 전 쯤 해경 123정 소속 고무보트(단정)가 4층 갑판에서 생존자 3명을 구조하고 있습니다.> 

  

 

 

22-1. 09:45 - 목포해경 경비정 123정의 비밀 (선장 탈출 장면 공개)

 

* 해경이 공개를 거부하던 목포해경 123 경비정의 구조 동영상을 4월 28일 발표했습니다. 이 영상에는 조타실 구조 전 구조 영상과 조타실 구조 당시 선장의 탈출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조타실 접근시 탈출 방송 실시, 3층 선수쪽 객실 창문 구조 장면은 이후 항목에서 다루었습니다.)

 

<배를 대고 경비정에 최초 이선한 생존자는 청해진해운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었으며, 사진의 노란색 상의의 조타수가 두번째로 탈출했고 세번째로 유니폼을 입은 여성 항해사(빨간 원)가 탈출 중에 뒤늦게 팬티바람으로 내려온 선장(파란 박스)이 먼저 경비정에 올라타려는 장면입니다.>

 

<많은 언론에 무전기라고 소개되었던 첫번째 탈출 승무원(1항사)의 손에 들려져 있던 건 무전기가 아니라 스마트폰이었습니다.(빨간 원 참고)>


<선장과 여성 승무원이 경비정에 탑승한 후 승무원으로 추정되는 4명의 생존자들이 추가 구조되었고 빨간 원의 아홉번째 승무원이 구조될 쯤 고무보트는 4층 갑판이 물에 완전히 잠기기 직전 탈출한 10여명의 생존자들(파란 박스)을 구조하고 있었습니다.>

 

<좌현 갑판에서 탈출한 12명의 생존자들을 고무보트에 태우고, 메달고 123정으로 접근 중인 장면(빨간 박스)입니다. 파랗게 표시된 조타실 2명과 바다에 빠져있는 인원들은 기존 발표된 헬기 영상에서 처럼 헬기에서 떨어뜨린 구명벌에 의해 구조됩니다. 위 사진을 보면 이때 4층 갑판은 완전히 물에 잠겨 탈출이 불가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 09:45 - 해경 123정이 세월호에 탈출 방송을 했었다?

 



- 해경에서 세월호 구조 당시, 9시30분부터 9시35분까지 선체를 향해 탈출 방송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따른 논란이 커졌습니다만 제일 중요한 근거는 해경 123정에서 찍힌 동영상입니다. 실제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9시35분이므로 9시30분~9시35분 방송 주장은 사실일 수가 없으며 이 밖에도 4월 28일 공개한 해경측 영상에는 확실히 이게 탈출 방송이었다...라고 할만한 부분이 없었습니다.

 

  또한 세월호에 근접하기 전 고무보트에 11명의 생존자를 구조한 후 조타실에 접근하며 탈출 방송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해당 영상의 음성이 헬기 소리와 구조 작업에 대한 추가 방송때문에 혼잡하여 소리 구분이 힘듭니다. 심지어 해경이 제공한 영상은 해경 123정에서 녹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해당 방송이 제대로 들리질 않았습니다.

 

  결국 해경이 이 부분을 증명하려면 당시 구조되어 경비정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에게서 방송을 들었다는 인터뷰를 얻으면 모든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만 아직까지 어떤 방송에서도 생존자가 선내에서나 해경에게서나 탈출 또는 퇴선 방송을 들었다는 증언은 없었습니다.

 


<연합뉴스 - 해경 123정 "세월호 승객 향해 '탈출하라' 방송" (기사를 보시려면 클릭)>

 

- 만약 해경 123정에게 당시 승객들을 탈출시킬 의지가 있었다면,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체가 너무 기울어서 조타실 진입이 힘들어 퇴선 방송이 힘들었다면 당시 조타실에서 나오는 승무원들에게 선내용 무전기를 가지고 나오라고 한 다음 안내실 사무원에게 연락해 퇴선 방송을 하라고 지시했어야 합니다. 또는 만에 하나 무전기가 없었다면 구조된 승무원들에게 선내 사무원의 핸드폰 번호나 안내실 전화번호를 물어서라도 연락해 선내 방송을 했어야 합니다. 설령 당시 해경 123정이 탈출 방송을 정상적으로 했더라도 헬기가 세대나 떠있어 매우 시끄러웠던 우현 객실 쪽엔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24. 09:45 - 우현 갑판의 헬기 구조는 신속 적절했는가?

 

-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해경 헬기는 09시 29분 비교적 신속히 현장에 도착했습니다만 당시 배의 기울기는 약 55도, 심각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아직 매우 늦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두번째 헬기는 09시 36분 도착) 배 밖으로 이미 대피한 소수의 승객들이 당장은 위험한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인원(약 10여명)을 태우기 위해 배 안에 갇혀 있는 수백 명의 승객들은 방송만 기다리며 선내에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마저도 처음으로 도착한 헬기가 태울 수 있었던 생존자는 고작 다섯명... 그 다섯명을 태우기 위해 배로 하강한 세명의 해경 특수 구조요원들 모두가 동원되었고 그 중 한 명은 다른 두 명의 구조요원의 행동을 여유롭게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첫번째 헬기가 처음으로 구조하는 영상의 시간을 재어보면 다섯명 중 세명을 구하는데 까지 걸린 시각은 약 8분 가량이었고 실제 123 경비정에서 촬영된 영상으로 보면 09시 29분에 도착한 첫 헬기가 09시 43분까지 구조를 진행합니다. 즉 다섯명을 구조하는데 무려 14분 정도가 소요되었다는 말인데 해경 경비정의 경우 09시 35분에 도착해 조타실에 배를 대던 9시 45분까지 약 10분간 11명의 생존자를 구조하였습니다. (해경 헬기는 기장, 부기장, 호이스트 작동 1명, 촬영까지 총 4~5명이 기본 탑승하고 있어서 그런지 한번에 5명 내외 밖에 구조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번째 사진은 세명의 헬기 하강 구조요원 중 한명의 구조요원이 5층 갑판 난간에 기대어 여유롭게 다른 구조요원을 구경하는  장면이며 두번째 영상은 위 빨간 박스의 구조요원과 다른 한명이 3층 선미쪽 갑판 근처로 내려가 대기하는 모습입니다. 이후 파란 박스의 두명은 3층 갑판 헬기 구조를 돕고 선미 갑판을 통해 바다로 내려갑니다.>

 

  이번 사고의 경우 구명조끼만 넉넉하다면 배 밖으로 나온 인원들은 99% 구조되어 생존했습니다. 즉 당시의 관건은 누가 봐도 세월호 바깥 갑판에 대피한 사람들을 배 밖으로 퇴선시키는게 아니라 선내에 갇힌 승객들을 최대한 많이 선내에서 탈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도착한 경비정도 마찬가지지만, 첫 도착한 헬기도 500여명이나 되는 승객을 태운 배에 너무 적은 인원이 갑판에 나와있다는 것을, 구명벌이나 기타 퇴선용 탈출 도구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심해서 상황을 살피거나 그 상황을 상부에 즉시 보고했어야 합니다. 

 

  해경 헬기에서 하강한 특수 구조요원들은 일반 해경과는 달리 수영은 물론이고 이런 극한의 해난사고를 다양하게 겪은 해난 및 구난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런 전문가들이 선체 외부에 대피한 인원들만 헬기로 후송하고 다시 헬기에 올라타 철수하거나 선미쪽을 통해 바다로 입수해버리는 과정은 절대로 이해가 안가는 대목입니다. 일반인도 헬기 탑승을 거부하고 선내에 갇힌 승객 탈출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와중에 헬기내 해경 승무원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아~나 저 분들 타라고 하는데도 안타~"  (Youtube 링크 : http://youtu.be/k-H1ZzaBBAY)

 

<첫번째 헬기가 구조한 다섯명을 인근 거차도로 후송하고 돌아올 때 쯤의 우현 갑판 상황. 당시 우현 갑판엔 20여명 정도의 승객들만이 나와있었습니다.(우현 후미 3층 갑판에 약 15명 정도로 제일 많음) 그 마저도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선내에 갇힌 다른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탑승을 거부하느라 구조가 원할하지 않았습니다.>


  헬기 레펠의 시끄러운 소음에도 헬기 승무원들 말 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 헬기 탑승을 거부하고 구조 활동을 하거나 다른 이유로 탑승을 거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헬기는 계속 상공에서 대기하고 탑승이 늦어지는 바람에 호이스트를 받아서 생존자를 태우려 준비하던 구조요원은 몇 분 동안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세월호 인근에 해경 통제에 의해 10대가 넘는 헬기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세월호 탑승객의 1/20 정도의 승객을 구하기 위해 09시 29분부터 10시10분 경까지 약 40분여의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저때라도 우현 4층 주요 객실의 창문이라도 깨뜨려 놓았다면 침몰 직전 4층 객실에 밑에서 부터 물이 들어 찰 때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은 창 밖으로 튕겨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배가 90도 이상 기울고 뒤집히면서 빠른 속도로 침수가 되더라도 일반인도 아닌 해경 특수 구조요원이라면 한두명이라도 남아 절벽이 되어버린 4층 홀 구조에 힘쓰던 김동수씨를 도와 수십명의 승객을 더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 위에서 말한 대로 침몰되기 직전까지 한개가 되었든 두개가 되었든 가능한한 객실 창문을 깨어두어 내부에 갇힌 승객을 탈출시키거나 탈출로를 준비해 두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해경 구조요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았습니다.

 

 

  

25. 09:50~ - 좌현, 우현, 선미, 우현 순으로 구조

 

- 배가 좌현으로 기울면서 침수되다보니 좌현 대피 승객의 구조가 급선무였습니다만 의외로 해경 출동 초기 좌현 갑판의 대피승객은 거의 없었고 대피 승객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의외로 좌현에서 조기 구조된 인원의 대다수는 승무원들이었습니다. 좌현의 경우 해경의 사진증거나 영상증거를 바탕으로 할 때 약 50여명이 탈출 및 구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초 인명 구조시간은 우현의 헬기가 더 빨랐지만 구조 특성상 헬기는 한명 한명 구조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기에 첫번째로 다섯 명을 가득 채우고 후송을 떠난 시각이 09시 44분 경이었습니다. 

 

  * 좌현 4층 갑판 11명 - 배를 통한 최초 구조로 해경 고무보트(단정)로 세차례 접근해 구조

  * 좌현 조타실 8명 - 경비정을 조타실에 대고 승무원들 구조

  * 좌현 4층 갑판 12명 - 4층 갑판을 탈출한 12명의 승객을 바다에서 고무보트(단정)로 구조

  * 좌현 4층 갑판 10명 - 3명은 조타실쪽으로 이동해 구조, 7명은 해경 투하 구명벌 및 고무보트(단정)로 구조

  * 좌현 조타실 추가 탈출 2명 - 조타실을 나와 바다에 빠졌다가 해경 고무보트(단정)로 구조

  * 좌현 선수 3층 객실 6명 - 해경 경비정으로 다가가 우측(밑에서) 두번째 창문을 깨고 구조

  * 본 내용은 4월28일 해경 123정 촬영 영상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실제 구조자 수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세월호 침몰 당시 선미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탈출, 구조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4층은 배의 구조상 선수와 선미 부분엔 갑판이 없고 중앙부에만 갑판이 있어 선수 쪽 객실과 선미 쪽 객실 모두 배 중앙쪽으로 이동 후 탈출해야 하지만 3층은 선수와 중앙부엔 갑판이 없고 선미부에만 갑판이 있기에 선미로의 탈출이 보다 용이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3층 승객들 중 선미부 출구쪽 승객들이나 선미 갑판에 미리 대피해 있던 승객들만이 구조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는 3층 선미를 통해 우현쪽 갑판으로 이동해 헬기로 구조되기도 했습니다.

 

- 10시 5분 경엔 선미 탈출 인원이 많지 않았지만 그 이후 선미쪽 탈출이 좀 더 늘어났던 걸로 보입니다. 당시 123정 소속 고무보트만이 홀로 선미에 접근해 구조를 시작했는데 10시 7~8분을 전후해 전남도청 어업지도선이 두척이 도착해 해당 어업지도선 제트보트 두대가 선미 구조를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선미 갑판으로 탈출한 승객 모두 구조하는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갑판 통로 부분입니다. 4층은 선수, 선미 모두 중앙쪽 갑판을 향해 탈출해야 하고 3층은 선미방향

으로 탈출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선미 탈출의 경우 3층 탈출 승객이 많았습니다.>

 

<출동 초기 선미 부분에서 6~7명의 승객을 구조하고 있는 해경 123정 소속 고무보트(녹색 박스) 모습. 승객들이 3층 갑판에 대피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배가 90도 가까이 기울어질 쯤엔 더 많은 인원이 선미 갑판을 통해 구조됩니다. 해경 고무보트(단정)와 어업지도선 모터보트 2대, 그리고 일반 어선들이 승객들을 구조한 후 다른 큰 배로 옮겨 태우고 다시 와서 태워야 할 정도로 선미에서 꽤 많은 인원이 구조되었습니다.>

 

  

 

26. 10:00~ - '움직이지 말고 객실 내 대기하라'는 선내 방송만 계속

 

- 선박직 승무원들이 모두 탈출한 이후, 선내에 남은 서비스직 사무원들은 안내실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선내 방송을 계속합니다. 이 방송은 10시가 넘어서까지 계속되었고 착했던 학생들은 어른들의 말만 믿고 선내 대기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생존자의 선내 촬영 핸드폰 영상 중 헬기 구조가 한창이던 09:40 경의 우현 3층 후미쪽 갑판의 모습입니다. 이 영상이 찍힐 당시에도 "현재 굉장히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세요"라고 계속 선내 방송이 나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27. 10:01~10:08 - 객실에 대기하라는 선내 방송의 피해

 

- 선박직 승무원들은 모두 탈출했고, 우현과 선미 갑판에 대피해 있던 승객들이 속속 해경과 어민들에 의해 구조되던 그 시각, 객실 내 한 학생은 오히려 배 밖의 친구들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배에선 10시가 넘어서도 안내실의 사무원이 해경 구조대가 배 밖에 왔으니 객실이 더 안전하다고 대기하라는 방송을 할 뿐 어느 누구도 이들의 대피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28. 10:05~ - 해경이 객실 유리창을 깨고 승객을 구했다?

 

- 사고 몇일 후 쯤 해경 측에서 선수 부분 조타실 아래 객실 창문을 깨고 6명을 구했다고 조용히 발표했습니다. 위에 적은 것 처럼 4층 객실이 아니라 3층 객실에 구명조끼를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는 승객들을 발견했고 경비정의 해경은 구조 도구를 이용, 어렵게 유리창을 깬 후 그 안에 있던 6명의 승객을 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경 발표 사진이나 영상 중 그런 근거가 없어 반신반의하던 중 당시 자료에서 아래 사진들을 발견했습니다.



- 위 첫번째 사진은 경비정이 첫 도착해 조타실 인원을 태우고 선수 좌측 방향에서 대기하면서 해당 경비정이 촬영한 영상입니다. 우측 주황색 박스 안을 보면 5층 갑판 지붕이 아직 물에 닿기 전 상황입니다. 이때 쯤 선수 3층 객실 창문으로 승객들의 구조 요청을 확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약 09시 38~45분 - 좌현 4층 갑판 대피 및 탈출한 생존자 11명 고무보트로 구조

* 약 09시 45~49분 - 조타실 인원 9명 좌현 갑판을 통해 경비정으로 구조

* 약 09시 48~55분 - 좌현 탈출 12명(좌현 갑판 탈출 10명+조타실 탈출 2명) 헬기 구명벌 및 고무보트로 구조

* 약 10시 05분~10시 12분 - 경비정이 직접 선수로 접근 3층 객실 유리창을 깨고 6명 구조

 

<5층 갑판 지붕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 시점에서 해경 123 경비정이 선수 쪽에 배를 대고 있는 모습이 다른 구조요원들의 촬영 영상에 잡혔습니다. 첫번째 사진을 잘 보면 경비정 앞쪽에 일단의 인원들이 모여있는게 보입니다. 그 위치는 정확히 선수 부분 조타실 아래쪽 3층 객실의 오른쪽에서 두번째 창이 위치한 곳입니다.>


<전남 707호 급수선에 경비정의 생존자들을 이선시킨 후 10시 6분 경 3층 선수 객실의 우측에서 두번째 유리창을 깬 해경이 창문을 통해 승객을 구조하는 장면입니다. 파도로 경비정이 움직이면서 창문으로 나오는 생존자가 끼일 수도 있어 매우 위험한 구조였습니다만 그 마저도 너무 빨리 가라앉는 바람에 시간이 부족해 몇 명 구조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창문에서 바로 경비정으로 올라타도록 하느라 꽤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을 보면 구명조끼 입은 승객은 바다로 뛰어들게 했으면 더 많이 구하지 않았을까 싶은 장면이었습니다.>


<3층 객실의 승객들을 경비정으로 태우느라 노력하던 시간 세월호는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해 단원고 2학년 7~8반 남학생들 수십명이 모여있던 4층 선수 객실 우측에서 두번째 창문(주황색 박스)이 물에 잠기기 직전 장면입니다. 저 때 해경이 경비정에 태우려고 시간을 버리는게 아니라 창문만 깨어 놓고 바다로 뛰어들게 한 후 구명부환이나 구명벌로 구조했으면 우측의 4층 선수 객실 창도 깰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결과론이고 급박한 상황이라 경황이 없었겠지만 워낙 경각에 달렸던 목숨이 많았던 시각이라 안타까움은 몇배로 클 뿐입니다.>


<심지어는 세월호에서 탈출한 항해사가 4층 선수 객실 두번째 창문을 가리키며 해경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듯한 장면도 해경 영상에 보입니다만, 당시 해경은 3층 선수객실에서 6명을 배에 옮겨 태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고 결국 단원고 학생 50여명이 갖혀있던 4층 다인실은 손도 못써보고 배를 뒤로 빼야만 했습니다.>

 

아래 내부도를 보면 위 123 경비정이 근접한 객실은 270인실이며 그 날 대부분 일반 승객 머물렀던 방입니다. 좌현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아래 방향인 좌현쪽 창 쪽에 승객이 모여 있었을 테고 그곳 창문을 깨서 승객을 구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지만 그것도 창문에서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흔들며 구조 요청하는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 다시 선수 쪽으로 접근해 구조한 것이었으며 270인실에서 6명밖에 구하지 못했다는게 조금 이해가 안가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더 자세한 영상자료를 접할 수가 없어 해경에서 직접 해당 영상을 공개하기 전엔 이 이상 확인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3층 객실 창은 깼으면서 왜 바로 앞 학생들이 머물고 있던 4층 객실 창은 깨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4월 28일 해경은 123 경비정의 3층 객실 유리창 제거 및 구조 장면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3층 선수 쪽엔 270인 정원의 대형 객실이 있습니다. 해경은 객실의 가장 밑에서 두번째 창을 깨고 이곳에서 승객 6명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29. 10:20 - 마지막 30여명의 극적인 우현 탈출, 어떻게 된걸까?

 



*본 내용의 더 자세한 사항은 '파란바지의 영웅 김동수씨 이야기' 글을 참고해주세요

 

- 09시 50분 경 첫번째 헬기가 다섯명의 구조자들을 1차 후송하러 떠난 시각, 세월호 우현 5층 갑판에는 세명의 해경 특수요원이 하강해 있었습니다. 한 명은 헬기 호이스트(구조용 바구니)가 내려오면 태울 승객을 위해 대기중이었고 또 한 명은 난간 안쪽 갑판에서 승객들을 난간 밖으로 끌어내는 중이었는데 청록색 원의 해경 요원은 1분 1초가 급박한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5층 난간에 기대 다른 승객들의 구조상황을 멀뚱히 구경만 할 뿐입니다.

 

  이때 4층 갑판에서 누군가 4층 홀쪽 입구(보라색 원)로 걸어가는 사람이 보입니다(파란 원). 복장을 보아하니 구조요원은 아니고 승객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구조장면을 핸드폰으로 촬영해 유명해진 김홍성씨 핸드폰 영상 속에 있던 그 파란바지의 남자였습니다. 제주시에서 화물차 운전기사로 일하는 48세의 김동수씨는 해경 구조요원 조차 선내 상황을 무시한 이 때 홀로 4층 홀 쪽으로 다가가 그 안에 수십명의 생존자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미 그 안은 절벽으로 변한 상황이어서 구명줄 없이는 아무도 탈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와 김홍성씨와 선내 복도에서 구조시 사용하던 소방호스를 어깨에 들쳐메고 4층 홀 입구로 와서는 난간에 호스를 묶고 구조를 시작합니다. 다른 이들은 헬기로 탈출하는데 급급한 상황이었지만 김동성씨는 탈출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 구조를 계속합니다. (4층 홀 안쪽엔 6살 권지영 양과 오빠, 그리고 학생들이 고립되어 있었으며 바닥쪽에 권 양의 부모님까지 있었던 것으로 후에 확인되었습니다.)

 


   우현 쪽의 헬기 구조가 끝나고 배의 기울기가 90도를 넘어가자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우현 갑판 3~5층에 있던 대부분의 생존자들 구조가 마무리 되어 3명의 해경 특수요원 마저도 헬기를 타거나 선미쪽을 통해 내려가버린 시점에, 김동수 씨(위 사진의 큰 빨간 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생존자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의 2/3가 물에 잠기고 기울기가 110도를 넘어가는 순간에도 4층 홀 입구에 보이는 생존자는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급격한 기울기로 인해 생존자들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그러나 세월호의 마지막 출구였던 4층 홀 입구가 물에 잠기기 직전 극적으로 생존자들이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해경 구조요원들도 신경쓰지 못했던 선내 고립 승객들을 살피던 김동수 씨가 아니었다면 그 4층 홀에선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만 결국 그의 용기 덕분에 무려 30여명이라는 추가적인 생존자가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 사진을 보면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학생을 붙잡고 있는 빨간 원의 남성이 김동수씨입니다. 물에서 허우적대는 6살 권지영 양을 끌어내 저 남학생에게 안겨준 후 그 남학생을 붙잡고 보트로 옮기고 있는 순간입니다. 네번째 사진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침몰 직전 가장 마지막으로 구조되는 김동수 씨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 위 이야기의 김동수 씨와 김홍경 씨 같은 의인들의 덕분으로 100도 이상 뒤집어진 우현 갑판에서 약 40여 명의 생존자를 추가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4층 홀 입구쪽에서 김동수 씨의 도움으로 약 30여명, 김홍경 씨가 있던 4층 선미 쪽 객실 입구에서 김홍경 씨 포함 4명이 구조되었으며 바다에 빠져 난간에 매달려 있던 학생 2명, 추가로 3층 갑판 등에서 탈출한 2명 정도가 해경 헬기가 못 다한 구조를 어선들과 해경 123정 고무보트, 전남도청 어업지도선 모터보트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 김동수 씨나 당시 4층 홀을 극적으로 탈출했던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들어 보면 바닷물이 4층 홀 입구로 밀려드는 순간에도 안에선 입구 밖으로 나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밀려드는 물살이 거세 빠져 나오지 못했고 만약 미리 4층 바깥 쪽 창문을 깨놨다면 탈출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울먹이는 내용이었습니다. 90도 이상 기울고 침몰이 속도를 내자 헬기 해경 구조요원은 모두 헬기를 타고 떠났고, 해경 경비정에 있는 어느 누구도 김동수 씨 처럼 갑판에 올라 선내 승객을 탈출시키는데 도움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처럼 객실 창문이라도 깨 놨다면 물이 차오르는 순간 튀어나올 수라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월호 마지막 구조자들의 더 자세한 사항은 '파란바지의 영웅 김동수씨 이야기' 글을 참고해주세요

  

 


30. 10:25~ - 완전 침몰까지 구조에 투입된 해경 경비정은 몇 대?

 

- 09시 35분경 최초 도착한 해경 경비정은 목포 해경 소속 100톤급 경비정 123정이었습니다. 이후 배의 마지막 탈출구(4층 홀 입구)가 물에 잠기며 급속히 침몰하던 순간(10시20분경)까지 해경 헬기 영상에 보이는 해경 함정은 123정 단 한대가 전부였습니다. 500여명이 타고 있는 여객선의 침몰 사고에 완전 침몰되던 순간까지 도착한 경비정이 단 한 대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목포 해경 소속 보유 함정은 총 28척으로 경비함정 17척(123정과 같은 소형경비정은 9척), 특수함정은 10척이 있으며 연안 구조장비인 H-04 공기부양정과 1톤급 소형 고속제트보트 5대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해경 중소형 함정들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속수무책이었다면 그들이 탑재하고 있던 고속단정이라도 먼저 출동시켜 구조를 도왔어야 합니다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해군에서 제일 빨리 출발한 450톤급 유도탄 고속함 한문식함은 세월호의 선수 일부만 물 밖에 보일 때 쯤 도착했습니다.)

 

<사고 당시 해양수산부 종합상황실 최초 침수 사고 보고서엔 해경 경비정이 4척, 해군 함정이 7척, 헬기가 3척 출동했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 이 밖에 목포 해경 123 경비정 외에 진도VTS의 협조요청으로 인근에 있던 어업지도선 전남 201호(100톤급)와 207호가 달려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해경은 123정 소속 고무보트 한대만이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에 비해 어업지도선 모터보트는 모두 두대가 선미 탈출 승객과 침몰 직전 우현쪽으로 빠져나온 승객들 다수를 구조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신고 초기부터 완전 침몰까지 약 1시간여 동안 홀로 고군분투했던 목포해경 소속 123 경비정의 세월호 완전 침몰 순간 모습>


<세월호 침몰 당시 구조작업을 펼치던 두대의 모터보트는 전남도청 소속 어업지도선인 전남201호와 전남207호>

 

<세월호의 마지막 출구가 물에 잠길 당시 최종 구조에 참여한 인원을 보면 해경 소속 고무보트 1대, 전남도청 소속 모터보트가 2대, 어선이 2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헬기를 제외한 해경의 구조 대부분은 저 고무보트 1대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세월호 침몰사고 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세월호에서 보내진 마지막 '카톡(문자)'은 10시 17분에 보내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배는 108.1도 기울어진 상태였으며 4층 어딘가에 고립되었던 이 학생은

"배가 기울고 있어. 엄마 아빠 보고싶어. 배가 또 기울고 있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해경 도착 당시(09:35) 선체 밖이 아닌 선내에 진입해 구조활동을 벌였다면

약 47분여의 시간동안 승객들이 대피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탑승자 전원이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수사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경향신문 2014.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