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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디지털 다큐> “너무나 새까맣던 손톱...살릴 수 있었는데, 이렇게 보내면...”

irene777 2014. 11. 6. 05:56



<세월호 디지털 다큐>


“너무나 새까맣던 손톱...살릴 수 있었는데, 이렇게 보내면...

‘세월호 희생자’ 영석 엄마 권미화씨의 200일 일기


- 한겨레신문  2014년 11월 5일 -





 오영석군의 가족 그림.   권미화씨 제공




“계절 두번 지났는데, 밝혀진 것 없어...대한민국 다 썩었다”

“아이 죽음 알고 싶을 뿐 그만하면 안되냐 말 가슴 무너져”

“아이들이 남긴 숙제...시간이 오래 걸려도 꼭 진실 찾을 것”



5일 오후 세월호 유가족들은 청와대 인근에 있는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 농성장을 비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기다린 지 7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04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경근 세월호 가족대책위 대변인은 4일 페이스북에서 “대통령을 만나려고 왔다가 수많은 국민 여러분의 사랑만 가득 안고 이 자리를 떠난다”며 “청운동에서 함께 생활하던 엄마들은 광화문으로 옮겨서 계속 국민 여러분을 만날 예정”이라고 글을 남겼습니다.


지난 3일, 오랫동안 청운동에서 지내온 고 오영석군의 엄마 권미화씨에게 근황을 물었습니다. “수학여행 간다고 떠난 지현이(고 황지현양)가 198일 만에 돌아와서 기쁘고 고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따뜻한 진심이 느껴집니다. 11월1일은 세월호 참사 20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진도와 안산, 서울 등 곳곳에서 세월호 참사로 안타깝게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영석 엄마’도 안산 합동분향소를 다시 찾아 아들의 얼굴을 대했습니다. 단어 하나에도 예쁜 사연이 참 많이 담겼다고 여기는 영석 엄마지만 “가을 단풍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낙엽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엄마 키만큼 훌쩍 자란 아들과 소소한 추억을 쌓으며 행복하게 살았던 그의 인생은 4월16일 이후 여러 번 흔들렸습니다. 집보다 거리를 서성이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팽목항과 진도 체육관에서 밤을 새우고, 국회 앞에서 자주 눈을 붙였습니다. 청운동에 짐을 풀고 광화문을 지나는 낯선 사람들을 붙잡고 세월호의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영석 엄마가 잊어버린 계절을 대신해, 그리고 지난 200일의 기록을 <디지털 한겨레>가 대신 전합니다.

  

 

# 첫 번째 기억 - 나무랑 얘기했습니다. 아들이 왔나 싶어서요.




▲ 단원고 친구들과 함께 잠들어있는 오영석군.   사진 권미화씨 제공



단원고 2학년 ‘영석이 엄마’ 권미화입니다.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졌어요.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마당에 텐트를 쳤는데, 바람에 텐트가 날아 갈까봐 밧줄로 단단히 묶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 매달린 낙엽이 흔들리잖아요. 그럴때면 나무랑 얘기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아들이 왔나 싶어서요. 비오면 비도 맞고 다녔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슬퍼서 우는 건지, 기뻐서 우는 건지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마음이 숙연해져요. 10월29일 오랫동안 기다렸던 지현이가 18번째 생일날 부모님 곁으로 왔어요. 우리는 한 사람의 소중한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현이가 안산 합동분향소에 있는 친구들 곁으로 돌아왔어요. 11월1일, 세월호 참사 뒤 200일이 지났지만 엄마 아빠들이 손을 놓지 않게 도와줬어요. 지현이가 국민한테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다시 한 번 얘기해준 것 같아요.



# 두 번째 기억 - 계절은 두 번이나 지났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 세월호 유족들의 울먹임을 듣지 못했을까? 듣고도 모른 체한 걸까? 

박근혜 대통령(아래 가운데)이 지난 10월29일 국회 시정연설을 마친 뒤 본청 앞에서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족의 외침을 외면한 채 걸어가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 길은 못 갑니다. 여긴 안 됩니다. 돌아서 가십시오.”


10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 차 국회에 왔던 날, 하루 종일 들었던 말이에요. 원통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이전에도 사고가 많았는데, 그분들은 왜 거기서 멈췄을까요. 저는 계속 한국에서 살아야 합니다. 자식을 여기에 묻었는데 어떻게 이민을 가겠습니까. 그래서 바꾸고 싶습니다. 우리 아들은 이제 곁에 없는데, 여름에 이어 가을로 계절은 두 번이나 지났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부모인 내가 먼저 자식한테 국화꽃을 놓게 되었으니까, 우리 아이들한테 미안해 왜 그렇게 떠나게 됐는지 알고 싶은데. 그동안 뭔가 알아낸 게 하나도 없어요. 예고 없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에요. 200일을 앞두고 있는데 아무 것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 대한민국, 다 썩었습니다.



# 세 번째 기억 - 어쩌면, 이제 아들을 내가 안아줄 수 없겠구나...




▲ 단원고등학교 2학년 7반. 사진 속 학생들 중 한 사람만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다.

사진 권미화씨 제공



4월 팽목항. 영석이를 5일 만에 만났어요. 사고 뒤로 3일이 지났는데 그때까지는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었어요. 팽목항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생존자 학생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첫 날 같이 배에서 뛰어내렸어요. 어머니.”


사고 당일 배에서 뛰어내린 영석이를 본 아이가 있다고 했어요. ‘배 안에 있으면 살아있겠구나’ 생각했는데 배 밖으로 뛰어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어요. 그때부터 영석이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손잡고 돌아오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어쩌면, 이제 아들을 내가 안아줄 수 없겠구나...



# 네 번째 기억 - 우리 아들이 아니었으면...

   

그날따라 아이들이 많이 올라왔어요. 여자 아이의 주검이 수습됐다고 하는데도 무조건 달려갔어요. 체육관 한 쪽 칠판에 써 준 인상착의 정보에 영석이가 입고 간 옷이 겹쳐졌어요. 그 순간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되는 구나’하면서도 우리 아들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냥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어요. 아이 아빠랑 아들을 만나러 가는데, 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지날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다음 아이가 우리 영석이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만나야하지.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런 말을 반복하면서 아이들 얼굴을 천천히 봤어요.



# 다섯 번째 기억 - 손톱이 너무 새까맸어요




▲ 고 오영석군의 생일 날.   사진 권미화씨 제공



익숙한 두상이 눈에 들어왔어요. 순간 걸음이 막 빨라지는 거예요. 아이 아빠는 영석이가 입고 간 바지를 보고 우리 아들인 걸 알았대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정말 우리 아들이 맞을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렵게 아들을 만났는데,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어요. 아들 손을 만져봤는데 손 끝에 손톱이 너무 새까맸어요. 차가운 물속에서 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쳤던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아이들이 숨 넘어 가기 직전까지 엄마와 아빠를 불렀을 텐데 부모로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을 안으면서 결심했어요. 분명 다 살릴 수 있었던 아이들인데, 아이들 이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 여섯 번째 기억 - 엄마는 죄인이 됐습니다




▲ 단원고 2학년 7반 부모들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 운동’.   사진 권미화씨 제공



아들에게 일찍 돌아 와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야 할까요. 아직 진도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애타게 가족을 기다리고 있어요. 뼈라도 좋으니까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가족도 있어요. 그분들 보면서 마음 놓고 아들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어디 가서 펑펑 울지도 못했어요.


이를 악물고 그냥 조용히 울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앞세운 저는 죄인이 됐습니다. 진도에 가도 죄인이 되고요. 재판장에 가면 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두고 혼자 살겠다고 탈출했는데, 엄마인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따가운 시선을 많이 느껴요. 우리 부모들은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가서 많은 사람들한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우리를 교훈 삼아서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다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제 그만 하면 안 되냐, 아직도 그러고 있냐...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 가슴이 무너져요. 유가족은 자식을 잃고 슬퍼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리고 남은 아이들(형제, 자매)을 보듬어줄 시간도 없었습니다.



# 일곱 번째 기억 - 몸이 편한 날. 그런 날엔 가슴이 아파요. 




▲ 15일 오후 경기 안산시 고잔동 단원고 2학년 4반 교실 책상에 화분과 꽃송이, 

음료수 등이 놓여 있다. 꽃이 시들지 않는 이유를 묻자 한 생존학생 학부모는 

“아이들을 잊지 못하는 가족과 친구들, 학교 교직원들이 늘 새 꽃으로 바꿔준다”고 말했다.

안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가끔 등·하교 하는 학생들을 숨어서 봅니다. 경쾌한 발소리, 말소리, 웃음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우리 아이들이 수학여행 떠날 때 그렇게 갔잖아요.


“잘 갔다 올게요. 어머니.”


‘잘 갔다 올게’ 그 한마디가 싫어졌습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있잖아요.


몸이 편한 날. 그런 날엔 가슴이 아파요. 실종자 가족한테 정말 미안한 말인데요. 아들을 먼저 보냈는데, 내가 이렇게 숨 쉬어도 되나 싶을 때가 있어요. 저도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나는 우리 아들만 슬퍼해주고 싶은데, 왜 내가 다른 가족들도 걱정해야 되나. 내가 왜 나라 걱정을 해야 되는 건가. 여태껏 몰랐는데, 그냥 계속 모른척하고 살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우리 아들한테 어떻게 가르쳤는데…’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어요. 저는 엄마니까, 진실을 찾아내야죠. 시간이 오래 걸려도 꼭 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 여덟 번째 기억 - 너희들 엄마아빠 잊었니? 한 번씩 꿈에 나와라.




▲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잠들어 있는 고 오영석군.

사진 권미화씨 제공



“오늘 참 예쁘구나. 너희들 엄마아빠 잊었니? 한 번씩 꿈에 나와라.”


합동분향소에 있는 국화가 시들어버리면 생화로 갈아줍니다. 아이들 얼굴을 마주보면서 얘기합니다. 아이들의 피부를 느끼고 싶어서 발 딛고 국화꽃에 얼굴을 묻습니다.


“엄마 잘 하고 있니? 너희가 잘 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들 다시 힘낼게. 너희가 칭찬을 안 해도 엄마 아빠는 끝까지 해볼게.”


지금은 사는 의미가 없어졌어요. 아이 키우는 그 행복으로 일이 힘든 줄 몰랐고, 시집살이가 힘든 줄 몰랐어요.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듯 영석이는 아무 조건 없는 그런 맹목적인 사랑을 하게 해줬어요. 이제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둥글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어요. 자식만 죽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을. 그래서 버티기가 참 힘듭니다. 사실은. 하지만, 여러분들은 지킬 수 있어요.



# 아홉 번째 기억 - 저는 제주도 똥돼지 먹으러 가니까, 어머니 많이 드세요.  




▲ 고 오영석군 생전 모습.   사진 권미화씨 제공



수학여행 떠나기 전에 아들이 좋아하는 삼겹살을 사줬어요.


“어머니 저는 제주도 똥돼지 먹으러 가니까, 어머니 많이 드세요.”


아들은 고기를 잘게 잘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깻잎에다 제가 매운 고추를 좋아하는 걸 알고 그것까지 알뜰히 넣어서 쌈을 싸주더라고요. 사실 저 삼겹살 안 좋아합니다. 지금은 더 싫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면 가끔 생각나요. 아들을 느끼고 싶어서요. 그 삼겹살 먹고 밤늦게 또 야식을 찾더라고요. 한참 크는 아이들이 식성도 좋잖아요.


“어머니 치킨 한 마리씩만 먹자.”


할머니랑 네 식구가 살아서 치킨을 두 마리 시킵니다. 요즘 아이들은 치킨 한 마리 다 먹거든요. 그래서 꼭 두 마리씩 시켰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들 하는 얘기가 있어요.


“엄마는 센스 쟁이야” 하면서 윙크 날립니다. 아들한테 용돈 한 번 그냥 준 적이 없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도와줬어요. 양말도 하얀 것만 사줬습니다. 삼색 슬리퍼 신고 나가면 저녁에 탄광 갔다가 온 것처럼 까맸어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아들한테 ‘사랑해’라고 말하면 대답을 하면서 꼭 예쁜 말을 한마디씩 보탭니다.


“세상에서 어머니가 최고야. 어머니를 못 만났으면 어떻게 하지...


그사이 그렇게 많이 컸더라고요. 그런 아들이 너무 그립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빨리 떠난 걸까요. 아이들 키우시는 분들 많이 표현해주세요. 하루 일상도 물어봐주시고요. 저는 그렇게 지내고 보냈는데 너무 그립습니다.



# 에필로그 - 엄마니까, 아빠니까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하면 솔직히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이 정도 했으면 우리 아이들이 그만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세월호 이 전에도 큰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많은 사고로 주저앉았던 그분들처럼 저희가 처음에 절망감을 느꼈을 때,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니까, 아빠니까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보다 더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요. 진도에 낚시를 가더라고요. 아직 진도에는 9명의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남아있습니다. 200일 보내면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시민들한테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제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오는 세상, 어른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세상,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들 영석이와 먼저 아이들이 남겨준 숙제가 아닐까요.


 

- 한겨레신문  박수진 기자, 사진 한겨레 사진부, 영석엄마 권미화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