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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대통령의 그 말들을...

irene777 2014. 11. 10. 23:58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대통령의 그 말들을...


- 시사IN  2014년 11월 7일 -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은 어쩌다가 말 바꾸기의 달인이 되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국면에서, 인사 참사에 대처하면서, 남북관계에서 여러 차례 말을 바꾸었다. 

최고 통치권자의 신뢰 상실은 국가의 불행이다.



세월호 유가족은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미소를 머금은 채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의 의전을 받으며 국회 본관으로 들어갔다.


시정연설 직후 여야 지도부와의 회동에서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이 “혹시 (유족들) 못 보셨나,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대통령은 또다시 유가족을 스쳐 국회를 빠져나갔다. 세월호 유가족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전날 밤을 새웠다.


10월29일 시정연설이 끝난 뒤 지난 5월16일 대통령과 세월호 유가족의 ‘마지막 면담’ 내용이 새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세간에 “세월호 유가족이 찾아오면 언제든지 만나겠다”라고 알려진, 대통령의 발언이다. 정확하게는 “앞으로 오늘 다 얘기를 못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속 시원하게 여러분들에게 계속 반영이 되고 투명하게 공개가 되는지 다시 의논을 드리겠다. 기회가 되면 여러분들 또 뵙도록 하겠다”라는 말이었다.




▲ 10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과 여야 지도부 회담을 마친 뒤 국회 본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월호 유가족을 그냥 지나가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그 후 5개월이 훨씬 지났지만 유가족은 대통령을 ‘또 뵐 수’ 없었다. 어떤 의논도 없었다. 당시 청와대가 이례적으로 공개했던 대화록 전문은 대통령이 국민을 속인 증거 자료처럼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이날 대통령은 특검과 특별법 이야기도 꺼냈다.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특검도 해야 한다. 진상 규명에 유족 여러분의 여한이 없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유가족 한 명이 검찰 수사에 대한 불신을 토로하며 유가족이 (수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요구하자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정말 그런 걱정은 안 하시도록 할 건가 깊이 고민하겠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고민의 결과는 ‘반전’이었다. 그로부터 꼭 4개월 뒤인 9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자는 주장은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삼권분립을 말하면서, 대통령이 국회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사실상 세월호 특별법 종료 선언이었다.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던 약속은 온데간데없었다.


정부도 대통령의 말 바꾸기 행보에 발을 맞췄다. 9월4일 한가위를 앞두고 김영석 해수부 차관은 갑자기 세월호 인양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한다. 유가족은 “아직 진입하지 못한 격실이 많이 남아 있다”라며 크게 반발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을 떠올려야 했다.


5월4일 대통령은 진도를 재방문해 “마지막까지 우리(정부)가 찾겠다고 약속을 드린다. 실종자 가족들께서 이제 끝내도 된다 하실 때까지 할 거니까 염려 안 하셔도 된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 되풀이하는 대통령 


유가족은 “이제 끝내도 된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럼 해수부 차관이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세월호 인양을 검토하겠다는 돌출 발언을 한 것일까. 결국 세월호에서 실종자 시신 한 구를 더 찾아낸 10월29일 정부는 세월호 인양에 반대하는 유가족 뜻을 존중한다는 방침을 뒤늦게 내놓았다. 대통령의 약속은 다시 한번 희화화되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인사 문제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1년4개월 동안 김용준·안대희·문창극 등 무려 3명의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는 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문창극 후보자의 낙마 이후 여론의 비난이 빗발치자 6월26일 청와대는 인사수석실을 신설해 철저한 사전 검증으로 유능한 인재를 두루 발굴하기로 했다고 발표한다. 당시 새누리당은 “도덕성과 능력을 겸비한 국가적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반겼다.




▲ 자니윤 한국관광공사 감사(왼쪽)와 김성주 적십자사 총재(오른쪽) 등 

청와대의 ‘철저한 인사 검증’은 무의미했다.   ⓒ시사IN 이명익



확신은 곧 민망함으로 바뀌었다. 다른 부처도 아니고 청와대 요직인 송광용 교육문화수석이 고등교육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는 가운데 자진 사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특히 송 전 수석은 수석에 내정되기 전 이미 경찰 수사를 받은 사실이 알려져 관계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청와대가 인사수석실 신설을 발표한 시점은 송 전 수석 내정 보름 뒤였다. 여당 내에서조차 “청와대가 무능하고 뻔뻔하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 뒤로도 인사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김성주 적십자사 총재는 적십자비를 한 번도 내지 않아 문제가 되었고, 곽성문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프락치로 활동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자니윤 한국관광공사 감사는 자신이 친박근혜계임을 강조하는 공모지원서를 쓴 사실이 밝혀져 논란을 자초했다. ‘철저한 인사 검증’이라는 청와대의 장담은 거짓말이거나 잠꼬대였다.


남북관계에서 대통령의 말 바꾸기와 오락가락 행보는 최고조에 이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초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경제협력 등 남북 화해 무드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관측이 쏟아졌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급물살’은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3월24일 핵안보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북한의 영변 핵 시설에서 화재가 나면 체르노빌보다 더 심각한 핵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반도 비핵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협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관계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영변 핵 시설은 체르노빌과 비교해 200분의 1 수준이라는 게 원자력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통일은 대박”이라던 국가원수가 갈피를 못 잡고 불안감만 조성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하는건지 ‘한반도 불신 프로세스’인지 헷갈린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 남북관계에서 대통령의 말 바꾸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북한방송마저 

   박 대통령의 말 바꾸기를 비판하고 나섰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급기야 북한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말 바꾸기를 비판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이 10월16일 아셈회의에서 또다시 핵 문제와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한 직후였다. 10월18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거명하며 “앞에서는 대화를 운운하고 돌아앉아서는 상대방을 헐뜯는 것이야말로 이중성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전시작전권 전환을 무기한 연기한 것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때 ‘2015년 전시작전권 전환의 차질 없는 준비’를 공약했다. 하지만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말을 바꿨다. 양국 정상이 전작권 전환 시기와 조건을 재검토할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대선 공약을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21> 김종대 편집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전시작전권 무기한 연기를 비판하며 “박 대통령은 말을 바꿔도 아무런 수치심이나 염치가 없다. 자기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라고 힐난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이 한창일 때 박 대통령은 “국민과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라며 원안을 고수했다. 결국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고, 그의 인기는 치솟았다. 그렇게 쌓아올린 신뢰의 이미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결정적 자산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지금도 그런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가 있을까. 오히려 여기저기 최고 통치권자로부터 속았다는 이들의 아우성만 넘쳐난다. 최고 통치권자의 신뢰 상실은 정치적 계산을 떠나 국가의 불행이다. 마침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나온다. 늘 있는 지지율 등락이라며 넘어가기에는 심상치 않아 보인다. 



- 시사IN  이오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