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면 ‘해직 기자로 산다는 것’
- 시사IN 2014년 12월 4일 -
노종면(사진)은 20년차 기자다. 그중 6년은 해직 기자로 보냈다.
아무리 질긴 사람이라도 나가떨어지기 십상인 지루하고 외로운 싸움을
노종면은 ‘끊임없이 기록하는 자’로 살아내며 버텨왔다.
노종면. 20년차 기자. 그중 6년은 해직 기자. 두 숫자는 앞으로도 당분간 나란히 쌓인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YTN 노조는 정권이 보낸 ‘낙하산’ 구본홍 사장 저지 투쟁을 벌였다. 그해 10월, 노조위원장 노종면을 비롯해 6명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들이 MB 정권 1호 해직 기자다. 2014년 11월 대법원은 6명 중 3명의 해고가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그날, 법원이 언론을 해고했다 참조). 노종면은 해고가 유지된 셋 중 한 명이다.
2009년 4월2일, 체포 12일째를 맞은 노종면 당시 YTN 노조위원장은 유치장에서 심혈을 기울여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키득거렸을 자세로, 머리카락과 이마 사이에 손가락을 넣은 채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한없이 진지하게.
이날은 그의 출소 예정일이었다. 취재진이 몰려와 사진을 찍을 터였다. 낙하산 사장 저지 투쟁의 얼굴인데 자존심이 있지. 그는 눌리고 가라앉은 머리에 볼륨을 주고 싶었다. 유치장에 헤어드라이어가 있을 리 없으니, 고민 끝에 중력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게 저 자세다.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띄울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볼륨이 살더란다. 그의 책 <노종면의 돌파>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 노종면 ⓒ시사IN 이명익
대법원 판결 이틀 전이었던 11월25일, 노종면을 만났다. 저 에피소드를 꺼냈더니 그가 유쾌한 목소리로 ‘비법’을 공개한다. “두피에 유분이 있으면 힘들어요. 딱 세수하고 머리 감고 난 직후가 가장 효과가 좋아요. 머리도 말려가면서(웃음).”
그가 ‘중력 드라이어’를 애용한 이유가 있다. 2009년 3월22일, 그는 집에서 자다 일어나 긴급체포된다. 머리카락이 잔뜩 눌려 엉망이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지금도 체포 당시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영 개운치가 않다. … 내가 YTN 노조를 대표해 어떤 이미지로 기록되는지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시간씩 ‘중력 드라이어’를 이용해 볼륨을 만들었건만, 자신의 뉴스에 출소 때 대신 체포 때의 머리 눌린 사진이 나오면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
노종면스럽다. ‘날것 그대로의 기록이 갖는 힘’을 너무나 잘 알기에, 웃어넘길 법한 사진 한 장도 몇 년씩 마음에 걸려 있다. 그는 YTN의 대표 상품인 <돌발영상>을 기획해, YTN은 물론이고 방송 뉴스 분야의 트렌드를 바꿔낸 선구자다. <돌발영상>이 등장한 이후, 권력자들은 언론의 ‘적당한 포장’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이제 카메라는 그들을 날것대로 노출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노종면은 트위터 등 각종 계정 ID로 ‘nodolbal’을 즐겨 쓴다. ‘노(종면)+돌발(영상)’이다. 그에게도 <돌발영상>은 언론인 노종면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 2008년 YTN 노조는 구본홍 사장 저지 투쟁을 벌였다. ⓒ시사IN
노종면의 반대편, 날것의 기록을 어떻게든 길들이려는 편에 정권의 핵심 실세들이 있었다. 신재민 당시 문화부 차관은 YTN 노조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공영방송을 하려면 <돌발영상>도 없애야 한다. 그게 무슨 가십이지 보도인가”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훗날 신재민 후보자 장관 인사청문회 때 녹취록으로 공개되어 그가 낙마하는 데 일조했다.
“정부는 고사하고 사장도 안 흔들렸어요”
6명이 해직되는 등 무더기 징계가 쏟아진 2008년 10월, YTN 회사 측은 눈엣가시였던 <돌발영상>부터 무력화했다. <돌발영상>을 만들던 PD 두 명이 해고(정유신)와 6개월 정직(임장혁)을 당했다. <돌발영상>은 임장혁 PD가 징계에서 복귀한 이후 잠시 재개되었다가 곧 폐지 절차에 들어갔다. 노종면으로부터 <돌발영상>을 이어받아 키웠던 임장혁(YTN 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장)의 회상이다. “6년 싸움 동안 가장 비참한 기분이 들었던 때는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돌발영상>이 회사 측이 꽂은 ‘자격 없는 이들’의 손에 망가지는 걸 볼 때였다. 나도 그렇지만 종면이 형이야말로 피눈물이 나겠지.”
<돌발영상> 무력화와 폐지를 주도한 배석규 사장 직무대행은 권력의 눈도장을 받는다. MB 정권의 민간인 사찰 진원지인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2009년 9월3일자 보고에서, <돌발영상> 담당 PD를 교체하는 등 “현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했다고 배석규 대행을 ‘치하’했다. 보고서는 그를 사장으로 임명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이후 배석규 대행은 정식 사장이 되어 지금도 재직 중이다.
“실망스러웠다고 할까 힘들었던 순간이라고 할까. 2012년에 ‘충성 문건’이 발견됐단 말이에요. 민간인 사찰의 결과물이, 굉장히 충격적인 문건이. 정부가 언론사를 사찰해서 언론사 사장 후보를 추천하고, 추천대로 됐고, 추천 사유가 충성이었거든요. 충성스럽다. … 정부가 흔들려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정부는 고사하고 사장도 안 흔들렸어요.” 앵커답게 차분하던 노종면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는 살짝 빨라졌다.
▲ 노종면은 ‘기록하는 자’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천안함 언론검증위원회를 꾸렸다. ⓒ시사IN 조남진
6년 동안 힘들었던 순간을 몇 번이고 질문을 달리해 물었더니 겨우 꺼내는 얘기가, 개인사의 고비나 힘에 부치는 순간이 아니라 이런 장면이다. 자신이 믿는 날것 기록과 상식의 힘이 생각만큼 작동하지 않을 때다.
기록하는 자의 정체성에서 멀어진다고 그가 처음 느꼈던 때는 노조위원장 시절이었다. 해고 이후 잠시 유치장에 있을 때에는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국회의원 재보선 출마 권유도 받았다. 구속까지 당한 마당에 싸움의 성격이 전면전으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도 제법 했다. 결국 남아서 싸우는 게 이기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010년, 노종면은 뜻밖의 계기로 ‘기록하는 자’로 돌아왔다. 그해 3월에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중이었다. 그때 천안함 침몰 사건이 터졌다. 꼼짝없이 누워서 모든 뉴스를 다 봤다. “다른 일 하다가 언뜻언뜻 봤으면 문제를 못 느꼈을 텐데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으니까 계속 봤어요.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4월 중순에 퇴원해서, 기자협회·PD협회·언론노조 이렇게 해서, 언론 보도 사실 검증을 해보자 하고 일을 벌였죠.” 정부의 합동조사단(합조단)을 긴장시켰던 천안함 언론검증위원회(검증위)는 이렇게 꾸려졌다.
어쨌거나 정부의 공식 조사에 딴죽을 건 것으로 비치는 프로젝트다. YTN 문제가 미해결이던 차에 부담은 없었을까. “너무 이상하다, 그냥 그게 컸어요. <조선일보>의 ‘인간어뢰’ 보도 같은 것도 굉장히 자극적이잖아요. 제 스스로 조금도 팩트에서 어긋난 일을 안 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YTN 싸움에 누가 될까 걱정한 적은 없어요. 저희 활동 성과가 조금씩 나오니까 <조선일보>는 아예 정부를 비판하는 사설을 써요.” 이상하니까 알아봤고, 확인된 사실만 썼다. 그는 그렇게 날것의 기록자로 돌아왔다.
▲ [국민TV] 개국 설명회 ⓒ시사IN 신선영
검증위는 사실 우선 원칙을 밀고 나갔다. 일종의 ‘음모론 퇴치 컨설팅’을 해주기도 했다. 각 방송사의 촬영 영상을 확보해 유언비어 검증을 했다. 그랬더니 국방부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6월에는 합조단과 검증위의 공개토론회가 열리기에 이른다. 기자 노종면은 이 토론회 이후로, 천안함 문제는 정치권력의 제한이 사라지면 언제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얻었단다. 아마도 그의 취재 복귀 아이템 목록에서 꽤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2011년 4월, 뜻밖의 반격을 받았다. 2심 재판부는 1심에서 전원 복직 판결을 받은 6명 중 노종면을 포함한 세 명의 해고는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1심 결과는 물론이고 2심 재판의 흐름으로 보아서도 예상하지 못하던 결과였다. 이후 계획을 전부 다시 짜야 했다.
본질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YTN 해직자의 복직을 막는 것은 방송 장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권의 선언으로 들렸다. 그렇다면? ‘밖에 놔뒀더니 오히려 더 골치 아프더라’고 느끼게 해주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트위터 계정 하나를 팠다. ‘용가리 통뼈 뉴스’. 알파벳 약자로 YTN이었다. 2심 패배 이후, 그는 1인 미디어 뉴스 생산자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하루 8시간을 투자하며 매달렸다. <동아일보>는 2011년 10·26 재보선(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한 재선거가 이때다)의 파워 트위터리안 12위로 ‘용가리 통뼈 뉴스’ 계정을 꼽았다.
다음 도전은 <뉴스타파>였다. YTN의 <돌발영상>과 MBC의 <PD수첩>을 상징하는 인사들이 해직자 신분이라는 데 착안한 언론노조는, 이들을 엮어 인터넷 뉴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1시즌을 돌려보는 프로젝트에 가까웠던 <뉴스타파>는 이제 정기적으로 뉴스를 생산하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대선 이후, 6년 싸움의 ‘바닥’을 보다
노종면은 <뉴스타파>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때마침 민간인 사찰 문건이 폭로되면서, YTN 싸움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안에 싸움 벌어졌으니까 들어오라는 요구가 많았죠. 국회에서 할 일이 많으니 의원들도 만나고 국정감사도 대비하고. 그때만 해도 ‘노 선배 왜 딴 데서 일해요?’ 하는 후배도 많았어요.”
대선이 코앞이기도 했다. 대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MB 정권이 세운 배석규 체제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었고 해직 기자 복귀도 임박해 보였다.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고, 뒤이은 주주총회에서 배석규 사장이 자리를 지켰다. 낙관은 해직 기자와 YTN 노조에 ‘집단 멘붕’으로 되돌아왔다.
▲ 11월27일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날 YTN 카메라가 그를 취재 중이다. ⓒ시사IN 신선영
2013년은 그에게도 시련의 한 해였다. 6년 싸움의 바닥이라면 이때였다. “해직 기자들, YTN, 언론계 전체가 침체된 때였으니까요. 심지어 해직 기자들끼리 매주 한 번씩 밥을 먹던 모임이 있는데, 그거마저 한동안 흐지부지되고. 대법원은 몇 년째 사건을 쥐고만 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내가 단식하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꼭 한다기보다도, 저도 주위도 자극이 필요한 시기여서.”
이후 노종면은 6년 싸움 중에서 가장 논쟁적이었던 선택을 한다. 대선 이후 탄생한 미디어 협동조합 <국민TV>에 합류하면서, 천안함 검증위나 <뉴스타파>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반대를 받는다.
<국민TV> 건, 반대 많이 받으셨죠?
꽤….
그 비판 중에 특히 아팠던 게 있습니까?
어… <국민TV>가 정파적이라는 비판을 흔히 받잖아요. 그거죠. 거긴 정파적인 덴데 왜 가냐. 그러면 저는, 정파를 보고 가는 게 아니라 보도할 곳을 찾아간다, 내가 보도하는 걸 보고 나서 판단을 해다오 그랬어요.
그때 갈증이 느껴지네요.
2013년에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보도와 관련해서는.
<국민TV>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 띄게 생기가 돈다. 언론 경험이 전혀 없다시피 한 수십명 신입 인력을, 시스템의 지원 없이 사실상 혼자 교육하고 지휘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출입처 시스템이 권언 유착을 불러 언론을 망친다”라고 주장해왔다. 그의 구상을 실현해볼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해고, 그리고 6년을 끈 재판. 아무리 질긴 사람이라도 나가떨어지기 십상인 지루하고 외로운 싸움을, 노종면은 끊임없이 기록하는 자로 살아내며 버텨왔다. 2011년에 쓴 책에서 그는 “나는 YTN의 기자, PD, 앵커였지만 이제 나는 그저 해고자였다. 이후 나의 3년은 해직된 처지에도 언론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싸움이었다”라고 썼다. ‘3년’을 ‘6년’으로 바꾸기만 하면, 이 문장은 재판이 끝난 지금도 유효하다.
- 시사IN 천관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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