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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근혜에게 순자(荀子)의 편지를 들려준다

irene777 2014. 12. 20. 04:17



박근혜에게 순자(荀子)의 편지를 들려준다

[제자백가의 백가쟁명] 어리석은 군주는 ‘여인련왕(癘人憐王)’


진실의길  김갑수 칼럼


- 2014년 12월 18일 -




오늘의 한국 정치인들은 자존심이 없다. 아니 자존심이라는 말도 아까울 지경이다. 그들에게는 범부나 소인들에게도 있는 배알도 없어 보일 때가 많다. 난국에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 각하’를 연발한 이완구, 불리하다 싶으니까 갑자기 신토불이(?) 수준으로 납작 엎드린 김무성 등은 여지없이 졸장부처럼 보인다. 게다가 세월호 재수(再修) 총리 정홍원은 또 뭐란 말인가?


그들에게 순자의 이야기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순자는 공자의 유학사상을 가장 온전히 계승한 제자백가 중 한 명이다. 순자에 관한 기록은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 있는데 그가 조(趙)나라 출신이라는 것 말고는 가계나 생장 등에 관한 기록이 소략하기 그지없다. 그의 생년(추정)은 기원 전 313년이므로 기원 전 551년생인 공자보다 200년 이상 후대의 인물인 셈이다.


흔히 우리는 순자를 성악설을 주장한 인물로 알고 있으며, 이것을 맹자의 성선설과 대비시킨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동양에는 악(惡)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악이 아니라 ‘불선(不善)’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맹자가 배타적인 왕도주의자였던 반면에 순자는 선왕후패론(先王後覇論)자였다. 즉 그는 왕도정치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패도(覇道)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진시황의 뛰어난 참모 이사나 법가의 시조 격인 한비자가 순자의 문하생이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뛰어난 패도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왕도의 가치를 높이 친 스승 순자의 가르침을 잘 간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순자가 최초로 지방관이 되어 초나라의 난릉 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하지만 그는 벼슬자리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았다. 당시 초나라의 춘신군은 귀가 얇은 군주였다. 그는 순자를 무고하는 한 문객의 말에 현혹되었다.


“지금 순자는 천하의 현인으로 장차 큰일을 도모할 만한 인물입니다. 그에게 1백 리의 땅을 내려 밑천으로 삼게 되면 장차 그대에게 오히려 불리할 것으로 보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춘신군은 이 말을 곧이듣고 두려움을 느껴 곧 사람을 보내 순자와의 절교를 통보했다. 군주의 ‘작은 그릇’에 실망한 순자는 주저 없이 관인(官印)을 내놓고 조국 조나라로 돌아왔다.


얼마 후 또 다른 문객이 춘신군에게 조언하기를,


“무릇 현자가 머무는 곳에서 군주가 존귀해지지 않거나 나라가 번영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순자는 천하의 현인인데 귀군은 어찌하여 그를 사절한 것입니까?”

춘신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춘신군은 즉시 조나라로 사람을 보내 순자의 조속한 귀환을 청했다. 순자는 즉각 춘신군의 제의를 거절하는 서신을 써 보냈다. 『전국책』에 실려 있는 순자의 서신 내용은 너무도 신랄하여 통렬하기도 할 뿐더러 서늘한 느낌까지 들 정도다.


“여인련왕은 공손치 못한 말이기는 하나 그 뜻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신하의 협박을 받다가 시해 당하는 군주를 두고 한 말입니다. 무릇 군왕이 어리석으면서도 자기 재주만 믿어 간신을 가려낼 법술을 알지 못하면, 대신들이 독단적으로 사리를 꾀하며 모든 권력을 자기들에게 집중시키기 마련입니다. 신하에 의해 시해 당하는 군주는 심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이 필시 문둥병자보다 더 심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문둥병자가 군왕을 동정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순자는 어리석은 군주를 ‘여인련왕(癘人憐王)’, 즉 문둥병자에게도 동정을 받는 존재에 빗대 놓고 있다. 나는 순자의 이 편지를 김무성, 이완구, 정홍원 등보다도 오히려 박근혜에게 먼저 들려주고 싶다.






<출처 :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