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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카드로 역습 즐기는 박근혜 대통령

irene777 2014. 12. 25. 16:39



‘종북’카드로 역습 즐기는 박근혜 대통령


- 시사IN  2014년 12월 23일 -




박근혜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NLL 논란,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등 ‘종북 공세’로 국면 전환에 나섰다. 측근 전횡 논란에 나라가 시끄러울 때 불쑥 ‘종북 콘서트’를 언급했다. 이 와중에 보수의 핵심 가치가 실종되었다.



측근 전횡 논란으로 최악의 위기에 몰린 지난 한 주, 천천히 가라앉는 배에 탄 박근혜 대통령은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짐 보따리 두 개를 던져버렸다. 던져놓고 보니 보수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원칙이었다. 


이른바 ‘십상시 문건’ 이후 촉발된 측근 전횡 논란은 한 달 가까이 정권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정윤회씨, ‘문고리 3인방’, 박지만씨 등 측근과 친동생이 연일 검찰을 들락거렸다. 문건 유출 혐의를 받던 최 아무개 경위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지지율은 정권 출범 이후 최저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 12월15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은 “이른바 종북 콘서트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우려스러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말한 ‘종북 콘서트’란, 북한 방문 경험을 책으로 썼던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였던 황선씨의 전국 순회 토크콘서트를 지칭한다. 보수 종편이 ‘종북 콘서트’라 부른 것을 대통령이 그대로 인용했다.




▲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종북 공세로 역습을 즐기기는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꺼내들었던 북한 카드는 노무현 정부의 NLL(북방한계선) 양보 논란이었다. 2013년 국정원 대선 개입 논란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에는 통진당 해산 청구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두 중량급 카드는 나름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급이 한참 낮았다. ‘종북 콘서트’는 TV조선 같은 보수 종편 시청자층에나 익숙할 뿐, 대중은 미처 체감하지도 못하던 설익은 이슈였다. 대통령이 얼마나 다급하게 국면 전환을 시도했는지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대통령의 의미심장한 ‘종북 콘서트’ 발언 


이 발언이 특히 의미심장했던 이유가 있다. 대통령의 발언 닷새 전인 12월10일, 한 고교생이 직접 만든 폭발물을 이 토크콘서트 현장에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44~47쪽 기사 참조). 극우 행동주의자들이 부쩍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던 차에, 고교생의 폭발물 투척은 한국형 극우 테러의 시대를 알리는 것처럼 보였다. 콘서트가 공론장에 알려진 것도 ‘종북’보다는 테러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테러 언급은 생략한 채 ‘종북 콘서트’만을 문제 삼았다. 테러에 면죄부를 준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테러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예민하게 대처하는 이슈다. 테러는 공권력을 부인하는 사적 폭력이므로, 정통 보수라면 오히려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테러에는 눈감고 테러 피해자를 비난하고 나선 12월15일의 대통령 발언은, 진지한 관찰자들에게는 대통령이 최소한의 합의조차 무너뜨린다는 인상을 주었다. 공권력을 우회하는 사적인 정치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보수의 대원칙은 이렇게 해서 보수 대통령에게 휴지 조각 취급을 당했다.


이것은 신호탄이었다. 전방위 종북몰이가 재개되었다. 다음 날인 12월16일에는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거침없는 테러 옹호론을 폈다. 


이날 김 의원은 정홍원 총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종북주의자(신은미·황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이를 보다 못한 우국 청년에 대해서는 일사천리로 법을 집행하는 것이 과연 정상입니까?” 이제 테러 혐의자는 우국지사가 되었고, 정부·여당이 딱지 붙이는 ‘종북’은 폭발물 공격을 받아 마땅한 대상이 되었다. 거리의 극우파가 아니라 여당 국회의원의 국회 발언이다. 


12월17일에는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선고 일자를 이틀 후인 19일로 공지했다. 이날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 2주년이었다. 헌재는 8대1로 해산 청구를 받아들인다고 선고했다. 이로써 통진당은 헌재의 결정으로 해산된 첫 번째 정당이 되었다. 통진당 소속 국회의원 5명도 의원직을 잃었다(20~21쪽 기사 참조). 지난해 11월 법무부가 정당 해산 심판 청구를 시작할 때부터 예견된 장면이었다는 평이 많다. 




▲ 박근혜 정부는 2013년 국정원 대선 개입 논란이 한창일 때 이석기 전 의원(위) 등 

이른바 RO를 문제 삼아 통진당 해산을 청구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종북 공세는 정권이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다는 유력한 징후다.”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의 진단이다. 그는 일련의 종북몰이를 ‘공안 정국’이나 ‘혹독한 겨울’과 같은 엄혹한 언어로 규정하면 본질을 놓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진짜 본질은 박근혜 정권이 다수파의 동의를 끌어내어 헤게모니를 유지할 능력이 파산했다는 데 있다. 지금 정권 지지 블록에는 강성 보수층만 남고 나머지가 떨어져나간 상태다. 이러면 통치가 안 된다. 이럴 때 종북 공세는 정권이 강한 게 아니라 약하다는 증거다.” 


종북 공세는 여론을 잠시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다수파를 만들지는 못한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세력은 진보와 보수 모두에서 극히 소수파이고, 이들은 적대적으로 공존하며 터무니없이 과잉 대표된다. 여론 지형의 재구성과는 거의 상관없는 드잡이질이라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종북 공세는 모르핀과 같다. 일순간 증상은 완화할 수 있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헤게모니 위기는 고스란히 재발한다. 다음 투여량은 더 늘려야 비슷한 약효가 있다. 역시 일시적인 마비 효과에 그친다(<시사IN> 제326호 커버스토리 ‘종북, 편집증 그리고 정신줄 놓기’ 참조). 


정권이 다수파의 동의를 이끌어내 통치하는 헤게모니 획득에 실패할 때, 모든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정권 보위의 자원으로 끌어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보통은 검찰이 손쉬운 대상이지만, 그렇게 동원해서는 안 되는 국가기구까지도 대상이 되어버린다. 박근혜 정부의 선택은 헌재였다.


헌재는 1987년 6월항쟁의 유산이다. 87년 헌법에 따라 탄생한 헌재는 최종 심판자로 꾸준히 위상을 높여왔다. 헌재의 위상과 역할이 어디까지여야 하는가를 두고는 다양한 논란이 있으나,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는 민주주의가 빠질 수 있는 다수결 만능주의로부터 기본권과 소수파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사회의 최종 심판자로 기능하려면 그에 걸맞은 권위가 필요하다. 사법부가 어느 한 세력의 대변자로 간주되어 권위가 실추되면 체제의 작동원리가 흔들린다는 우려는 보수의 논리에서 더욱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헌재를 정치적 갈등에 날것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그래서 보수에게 더 중요한 숙제다. 




▲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12월19일 보수 단체들이 

통진당 깃발을 찢는 퍼포먼스를 했다.   ⓒ연합뉴스



위기 탈출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버린 두 번째 짐보따리가 이것이었다. 통진당 위헌 정당 청구는 헌재를 정치적 논란의 소용돌이에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시급함도, 실익 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판결이 어느 쪽으로 나든, 정당 해산 청구가 시작된 순간 헌재라는 최종 심판자의 권위에는 손상이 불가피했다. 체제의 안정성이라는 보수의 성배에는 이렇게 금이 갔다. 



대통령 지지도 37%, 정권 출범 이후 최저치 


헌재가 통진당 해산 판결을 내리던 12월19일, 한국갤럽은 주간 정례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37%로, 정권 출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출범 이후 60% 안팎을 넘나들던 정권 지지율은 세월호 정국에서 40%를 기록하며 최저점을 기록했다가, 최근에는 40%대 중반에서 횡보하던 참이었다. 측근 전횡 논란은 정권 지지율 40%라는 심리적 저지선을 무너뜨렸고, 영남과 여성이라는 핵심 지지층마저 균열을 냈다. 당장의 숫자보다도, 추세가 좋지 않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에 공무원 연금 개혁과 노동시장 구조 개혁이라는 굵직한 국정 과제의 집행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연금 논란에 따른 관료 조직의 민심 이반이 심각한 데다가, 정권 지지율마저 하락세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국정 추진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 통진당 해산으로 열어젖힌 종북몰이 정국은 당분간 ‘모르핀 효과’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정권 지지율 자체를 50%대 이상으로 끌어올릴 추세 반전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소수 극우 블록의 주장과 달리, 박 대통령이 종북주의에 단호히 대처하지 않아서 지지 여론이 이탈한 것은 아니다.


위기의 본질은 다수파 연합을 유지하는 데 실패해 헤게모니를 잃은 것이고, 이에 대한 정권 차원의 대응은 ‘보따리 내던지기’에 가깝다. 사적인 정치폭력 금지와 최종 심판자의 권위 보호라는 보수의 핵심 가치들이 정권 보위의 대가로 배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렇게 해서 열어젖힌 종북몰이 정국은 추세 반전 효과도 의심스럽다.  


바둑 격언에 “묘수 세 번 내면 진다”라는 말이 있다. 묘수를 세 번이나 내야 하는 국면이면 이미 판세가 나쁘다는 뜻이다. 집권 2년차도 끝나지 않았는데 정권이 자꾸 묘수를 내고 있다.



- 시사IN  천관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