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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강윤 - 가난은 나라가 구하는 게 맞다

irene777 2015. 2. 8. 21:57



[이강윤의 쓴소리]


가난은 나라가 구하는 게 맞다

유리지갑 털어 복지? 이건 복지가 아니라 착취다


- 미디어오늘  2015년 2월 5일 -




▲ 이강윤

국민TV  ‘이강윤의 오늘’ 앵커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고? 물정 모르는 고랫적 옛말이다. 부자는 못 만들어도 가난은 구한다, 구해야 한다. 그게 근대 국가다. 대한민국은 두 말 할 필요 없이 근대 국가다. 


‘가난’을 아는가. 가난은 '그저 조금 불편'한 게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거나, 지갑 사정 헤아려보다 뭔가를 포기하는 정도가 아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우유를 끊거나 학습지를 중단시키는 정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혹자는 이럴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정신을 모른다고. 혹은 천박한 속물근성과 물욕 때문에 ‘결핍’을 참지 못한다고. 미안하지만 그 사치스러운 입은 다무시라. 임계선 상의 처절한 가난을 모르면 그냥 가던 길 가시라. 대신, 혹시라도 자신이 먹이사슬의 수탈적 상위에 있는 건 아닌지, 성찰은 하시길 바란다.  


가난은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한다. 그 불안은 영혼을 좀먹는다. 그러다 결국 황폐해진다. 사람이 황폐해진다. 그에게 일상은 그저 하루하루 이 악물고 버텨내야 하는 숙제이자 고통이다. 극한의 고통까지 감내하면서도 형편없는 시간 당 임금은 자존감을 치명적으로 떨어뜨린다. 사람을 위축시킨다, 무기력하게 한다. 그러다 종내는 대인기피증 같은 것을 부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 우월감’을 얻지 못해 힘든 게 아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힘든 거다. 희망없음을 힘들어하는 거다. 벗어날 수 없는 나락감에, 그 절망감에 무기력해지는 거다. 흔히들 ‘산다는 게 본시 그렇게 비루하고 처절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 말, 머리로는 동의할지 모르지만, 막상 몸으로는 동의가 안되는 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가난이다. ‘산다는 게 본시…’라는 말이 위로로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벽 변두리 버스정류장에 나가보라.




▲ 지난해 6월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한 호텔에서 열린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 화동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문제는 여기부터다. 사회가 가난을 가난한 사람의 무능과 못난 탓으로 돌리며 부끄러워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제 무능을 탓하며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든다. 남루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모든 이들의 한결같은 본능적 정서다. 모든 이는 위아래가 따로 없이 한결같이 존귀하며,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천부의 인권을 가졌다는 말은, 미안하지만 잠시 넣어두시라. 해질 녘 리어카에 자기 몸집의 두어 배는 될 라면박스와 파지를 잔뜩 실은 채 언덕배기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놔두고서 안빈낙도나 복지를 말하는 것은 사치를 넘어 죄악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왜 세금을 걷는가. 세금 안내면 왜 빨간 딱지 붙이고 집달리들이 찾아오는가. 세금받는 대신 생존의 조건을 마련해줘,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을 영위토록 하기 위해서다. 그게 국가가 정부를 통해 납세자들에게 한 ‘계약’이다. 납세자들은 그 계약을 믿고 세금을 내는 것이다. 오늘도 세금 밀리지 않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것이다. “세금과 방세 밀려 미안하다”며 흰 봉투에 빳빳한 돈 곱게 넣고 생을 마감한 송파 세 모녀가 비단 그 가구 뿐이겠는가. 모든 납세자(국민)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을 영위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와 내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같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 자체가 미안스러워지는 삶이 주변에 널려있다.


그래서 ‘복지’라는 개념이 생겼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는 엇갈리지만, 목불인견의 처참한 생존을 그대로 놔두면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또는 혁명까지는 아니어도 폭동이나 사회불안이 누적될 테니까, 빈부 격차를 방치하다가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혁명을 맞느니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나으니까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더 테레사’ 같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복지가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것은 순진하거나 무지하다.  처참지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쿠폰 발행이건, 감세건, 의료구호건 국가별로 복지정책의 방법은 다양했다. 


방법이야 어떻건 간에 복지정책이 성공하려면 이 점 하나만은 분명히 확립되어야 한다. 가진 자가 베푸는 방식이어선 진정한 복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적선(積善)이다. 적선의 밑바탕에는 기복적 희구가 자리잡고 있다. 선을 베품으로써 좋은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동양적 정서가 깔려있다. 그러므로 적선은 기본적으로 일과성이고, 시혜(施惠)다. 적선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구조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개인적 행위라는 것이다. 가난은 개인적 시혜나 기부로 추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게 정부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정부를 통해 행해지는 정책은 그러기에 구조화와 정합성이 필수다.  이제는 입이 아파서 신물이 넘어오는 얘기지만, 돈 없이 하겠다는 복지란 사기다. 엊그제 여당 대표가 국회에서 “증세없는 복지를 말하는 정치인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2년 여 전 당시 박근혜후보의 선대본부장으로, 비 오는 부산역 광장에서 남북정성회담회의록을 놀랄만한 기억력으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어내려가는 신공을 발휘했고, 상대 후보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당시 복지 논쟁도 큰 이슈였다. 기억력 비상한 그 선대본부장은 자신의 주군과 함께 “증세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사자후를 토했다. 그러던 그가 대선 후 경제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제야 ‘증세없는 복지는 거짓’이라는 걸 터득했다는 말인가?  복지정책학개론 1장에 나오는 이 명제를 이제사 깨달았는지는 개인적 학습능력의 차이라고 치고 일단 밀쳐두자. “비박계 유승민 후보가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기지 못했더라도 김무성대표가 그렇게 힘주어 말했을까?” 라는 질문도 거두겠다.


문제는, 그리고 관심은 청와대의 태도변화 여부다. 절대적 권위에 조금의 손상이라도 가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박 대통령이 권력 기반의 중추인 여당의 대표와 신임 원내대표의 공개적 파상공세에 어떻게 대응할까. 노선 대선회를 한다면 그 명분과 방법은 뭘까. 대선 기간 중 철석같이 강변했던 호언장담, “증세없는 복지”를 수정하기 위해 어떤 명분을 고르고 있을까. 누구 호주머니에서 어떻게 증세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라는 귀절은 대통령이 그간의 수 년여 ‘경제 과외공부’에서 익히 들었을 터이다. 깃털 몇 개 뽑아도 죽지 않을 거위에게서 깃털을 뽑아야 한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다. 깃털 때문에 거위를 죽여서야 그게 어찌 복지인가, 살상이지. “국민 모두가 고통 분담 차원에서 마른 수건 물 짜듯 근검절약으로 해결하자”고 할까봐 심히 걱정이다. 

 

‘착취’라는 한자어가 있다. ‘착’은 ‘마른나무 비틀어 짤 착(搾)’이고, 취는 얻을 취(取)이니, 착취는 비쩍 마른 나뭇가지를 비틀고 또 비틀어 짜낸다는 뜻이다. 서민증세는 착취다. 복지는 서민증세로 하는 게 아니다. 기업 곳간에 쌓여있다는 2,000조원의 사내유보금과  잉여금은 누구의 피땀으로 쌓인 돈인가? 이자 0.1%만 더 줘도 수  천억원씩 몰린다는 유한계급의 뭉칫돈 중 ‘깨끗한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파지 할머니’들을 놔두고 복지를 말하지 말라. 연봉 오륙천 유리지갑들의 세금으로 복지재원 만들려 하지 말라. 그건 복지가 아니라 착취다. 가난은 나라가 구하는 게 맞다.



- 이강윤  국민TV ‘이강윤의 오늘’ 앵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