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에 대한 소회
[이완기 칼럼] MBC가 진정한 ‘MBC의 명예’를 되찾는 길은 없는 것일까
- 미디어오늘 2015년 2월 1일 -
▲ 이완기 민언련 공동대표
명예란 무엇인가.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2013년 국정원장 재임 시, 비밀문서인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행위에 대해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했다. 국정원이라는 ‘조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법질서를 위반하고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범죄행위’마저 불사했다는 것이다.
김진태 검찰총장도 ‘명예’를 강조했다. 2012년 국정원 대선 관권개입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박근혜의 눈 밖에 나 하차하자, 후임 김진태 검찰총장은 2013년 취임식에서 “공직자로서의 명예와 자존을 지키는 당당한 검찰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1년여 재임기간 동안 김진태의 검찰은 명예는커녕 정권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정원 선거개입의 주범 원세훈은 1심에서 혐의를 벗었고, 서울경찰총장으로 이 사건 수사를 축소․은폐했던 김용판은 지난 29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박근혜 대통령 또한 ‘명예’를 국정운영의 우선적 가치로 여긴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골든타임 7시간 행적을 언급한 야당 의원을 겨냥해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라고 했다. 무고한 304명의 생명보다 대통령의 ‘명예’가 더 소중한 박근혜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박근혜는 여기서 대통령 앞에 ‘국민을 대표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민의 명예’를 앞세우는 치밀함을 보였다.
1998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자신의 비리를 보도한 MBC <2580>이 ‘교회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일간 신문에 광고를 내고 신도들을 부추겨 聖戰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신도들은 여의도 소재의 MBC 주변을 둘러싼 채, 출입을 방해하며 시위를 벌였고 일부 신도들은 MBC의 담장을 넘어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MBC는 안타깝게도 교회 권력에 굴복해 비리 목사와 타협했다. 하지만 이후 김 목사는 사기미수 혐의로 법정에서 구속됐다.
‘명예’는 인간사회의 세속적 가치일 뿐이다. 하지만 명예는 내가 아닌 타인이 달아주는 훈장인 경우에 빛을 발한다. ‘명예로운’이라는 수식어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나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 품격 있는 사람 또는 조직에, 공감하는 다수의 대중들이 붙여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명예’가 권력자의 권위를 지켜주는 도구가 될 때, ‘명예’는 권력자들이 집요하게 탐하는 겉치레의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그러한 ‘명예’를 두고 수면 위에 생긴 파문이라 했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고 했다.
남재준과 김진태는 국정원과 검찰의 명예를, 박근혜와 김홍도는 국민과 교회의 명예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추구하는 명예의 목적은 알량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거나 개인의 정치적, 종교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술책이며 ‘짝퉁 명예’일 뿐이다.
최근 MBC경영진이 ‘MBC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입사 3년차의 권성민 예능 피디를 해고한 사건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지난 30일 MBC경영진은 ‘MBC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권 피디에 대한 해고를 확정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MBC 보도에 대해 MBC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성의 목소리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가 6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았고, 정직 기간이 끝나자 자신의 업무와 전혀 무관한 경기지사로 발령이 났다. 권 피디는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웹툰을 통해 토로했다가 지난 23일 징계위원회에서 해고됐고 재심신청을 했지만 30일 재심에서 해고가 확정됐다.
MBC는 권 PD가 웹툰에서 “회사에 싫은 소리 했다가 수원으로 출퇴근 중”이라는 말과 ‘유배 생활’이라고 표현한 것을 해사행위라고 규정했다. 경영진은 권 피디가 블로그에 올린 글 중에서 “언론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방송사의 예능은 마약일 뿐”이라는 대목을 ‘용납할 수 없는 모독’이라고 했다. “마약제조업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한 대목에 대해서는 여타의 예능PD들을 마약제조자로, 시청자들을 분별없는 사람들로, MBC를 마약제조판매회사로 비하한 것이라며 격노했다고 한다.
권 피디의 글에 대한 MBC경영진의 이러한 해석은 그야말로 풍자와 은유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논리비약이다. 30여년 가까이 방송 밥을 먹은 경영진이 권 피디를 ‘갓 걸음마를 뗀 미숙한 방송초년병’으로 폄하한 저변에는 30년 전 구시대의 인식에 머물고 있는 어른스럽지 못한 경영진의 모습이 보여 안타깝다. 경영진이 내세운 ‘MBC의 명예’는 실제로 경영진 개개인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노조에 대한 콤플렉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래로, 관권부정선거, 간첩조작사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등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굵직굵직한 이슈들에 대한 MBC의 보도태도는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정치편향을 넘어 청와대 대변인을 방불케 할 정도였으며 5공시대의 방송을 보는 듯했다. 특히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MBC의 왜곡과 유가족들에 대한 조롱은 언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정도로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MBC 경영진이 그런 문제들에 대한 일언반구 반성 없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고백한 직원에게 징계의 칼을 휘두른 것은 공영방송 MBC에 대한 치욕의 역사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고 하듯, 경영의 핵심은 적재적소의 인사배치에 있다. 조직운영이나 인사에 대한 반대와 불만은 어떤 조직에서도 있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조직을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경영진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할 제작인력들을 회사에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무더기로 업무특성이 낯선 곳에 배치하거나 예비군훈련을 방불케 하는 교육시간으로 때우게 하는 이러한 인사행위야말로 MBC를 침몰하게 만드는 핵심 원인이다.
2012년 MBC노조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 분루를 삼키면서 파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MBC경영진은 2012년 파업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2015년인 지금도 그렇다. 경영진은 노조를 길들이기 위해 구성원들 대다수를 적으로 규정하고 소수의 친위대들만으로 거대한 MBC를 끌고 가고 있다. 그 결과는 각종 조사에서 신뢰도와 공정성 꼴찌로 드러났으며 그 책임은 온전히 경영진에게 있다.
경영자는 한 사람의 구성원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설령 그에게 결함이 있더라도 함부로 목을 치는 인사 행위는 결코 존중받지 못한다. 권성민 피디에 대한 징계위원회에서 단 한 사람의 다른 목소리도 없었다는 것은 현재 MBC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MBC가 남재준, 김진태, 박근혜, 김홍도 등의 ‘짝퉁 명예’가 아닌 진정한 ‘MBC 명예’를 되찾는 길은 없는 것일까.
- 이완기 민언련 공동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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