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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주진우의 소송 매뉴얼 “옳은 게 늘 이기는 건 아니다” - "주기자의 사법활극"

irene777 2015. 2. 10. 05:23



주진우의 소송 매뉴얼 “옳은 게 늘 이기는 건 아니다”

무조건 변호사부터 찾고 필요하다면 관할 변경 요청하고 묵비권 행사도


[서평] ‘주기자의 사법활극’


- 미디어오늘  2015년 2월 4일 -




시사인 기획취재팀장 주진우가 쓴 <주기자의 사법활극>(주진우, 푸른숲)이 나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가 썼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나쁜 사람들’에 대한 글쓴이의 깊은 분노가 느껴진다. 기자를 겁박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소송에 수없이 노출되며 쌓여온 고통과 인내도 문장마다 서려있다. 이 책은 100여건의 민‧형사 소송을 경험한 자칭 소송전문기자 주진우의 ‘소송연대기’이자, 불온한 시대에 소송의 노하우를 시민에게 전수해주는 법률정보 실용서다.


많은 사람들이 뉴스에 등장하는 ‘구형’의 뜻을 잘 모른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3년 구형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정말 3년 동안 감옥에 가는 줄 알고 지나치는 사람이 보통이다. 하지만 구형은 형사재판에서 검사가 판사에게 피고인에게 내려주길 바라는 형벌의 내용이다. 검찰의 ‘주장’에 불과하다. 검찰은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을 보도한 주진우 기자에게도 징역 3년을 구형했지만 결과는 무죄였다. 


<주기자의 사법활극>은 ‘피의자’ ‘고소’ ‘기소’ 등 언론이 흔히 사용하지만 그 뜻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법률용어부터 쉽게 설명해준다. 글쓴이 본인이 경험한 소송 사례와 취재과정으로 알게 된 효과적인 소송 방법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330여 페이지에 녹였다. 책의 목적은 소송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판례를 쉽게 찾는 방법부터 양형을 낮추는 전략까지 소개한다. “검사나 판사가 중시하는 것은 일관성”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검찰청‧법원에 가면 침묵이 다이아몬드다”라고 말한다.




▲ 주기자의 사법활극 / 푸른숲 / 14,500원

 


주진우 기자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소송경험을 ‘숨 막히게’ 접해왔다. 그래서인지 재판에 대한 정의부터 명확하다. “재판에는 진실이 없다. 같은 사건인데도 당사자의 기억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증거를 통해 재구성되지 않으면 사실로 인정받기 어렵다. 변호사의 스토리와 검찰의 스토리 중 어떤 게 더 믿을 만한지 다투는 과정이 재판이다. … 재판을 그르치는 가장 흔한 예는 자기가 옳다는 확신만 갖고 검찰이나 법원에 가는 경우다.” (P.90)


글쓴이는 형사사건과 민사사건의 차이도 쉽게 설명해준다. “민사재판은 보상 받으려는 사람이 모든 걸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손해를 충분히 보상받기 어렵다. 그러나 형사재판은 내 말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검사의 논리에 구멍을 내는 싸움이다. 검사 주장 중 말이 안 되는 것 하나를 무너뜨리는 게 형사재판 전략이다.” (P.102) 이쯤 되면 변호사가 필요 없는 법률가 수준이다. 하지만 주 기자는 “법적 문제가 생기면 돈 아낄 생각 말고 무조건 변호사부터 찾아가라”고 말한다.


그가 밝힌 변호사 선임 노하우도 흥미롭다. 그는 “아무리 유명한 전관 변호사를 쓰더라도 너무 바빠서 나를 만나줄 시간이 없다면 좋은 변호사가 아니다”라며 “내가 재판을 한다면 젊고 꼼꼼하고 성실한 7~10년차 변호사를 고르겠다. 항상 전화 통화가 되는 사람이면 무조건 맡기겠다”고 말한다. 주 기자는 “재판을 백 번 가까이 치르면서도 내 이야기를 마음에 들게 알아서 서면에 반영해준 변호사는 만나지 못했다”며 최대한 변호사를 괴롭히라고 강조한다. 그는 적절한 성공보수를 거는 것도 변호사의 동기부여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는다. “민변 소속 변호사들은 가슴이 따뜻하다. 의뢰인 앞에 놓인 위험을 과장해서 돈을 뜯어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민변 변호사들은 주 기자와 함께 ‘박근혜 5촌 살인사건’ 1심과 2심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 법정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시사인 주진우 기자   ⓒ연합뉴스


 

이 책의 중심이 되는 스토리는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이다. “나는 변호사 자문을 구해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까지만 기사를 썼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법대로라면 구속영장을 도저히 칠 수가 없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사건은 죄와 상관없이 굴러갔다.” 검찰은 2013년 5월 주진우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법원은 영장청구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주 기자는 수갑을 차야 했고, 48시간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는 유치장에서 세 명의 범법자를 만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법에 너무 무지했다. 돈이 없는 친구들도 아닌데. 이들 같은 잡범이 아니라 진짜 억울하고 몰라서 당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내가 기자 생활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수많은 소송에서 얻은 경험이다. 유치장에서 세 명의 잡범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터득한 실전 법률 노하우를 언젠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유치장에서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P.218)


주 기자는 영장실질심사 당시에 대한 심정도 털어놨다. “영장실질심사는 판사가 검사의 공소내용을 보고 질문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당사자가 판사에게 직접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자기 사건을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드시 이틀 정도는 예행연습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나는 여러 변수 때문에 아무런 준비 없이 맨 몸으로 들어갔다.”(P.206) 하지만 그는 구속되지 않았다. 유죄를 선고받지도 않았다. 오로지 사실만을 추적했던 언론인의 승리다.


이 책은 언론인이 부당한 권력에 맞서 기사를 써온 기록물인 동시에 ‘피의자의, 피의자를 위한, 피의자에 의한 실전 소송 및 재판 매뉴얼’이다. 책 값 14,500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실용정보가 쉽게 소개되어 있다. 예건대 그는 “법정에 반전 드라마는 없다”고 강조한다. “만약 나를 잡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검사나 경찰이라면 관할을 바꿔달라고 신청하라”, “묵비권은 권리이자 개인이 가진 유일한 무기다”와 같은 조언과 당부도 아끼지 않는다. 


이 책에선 법에 대한 글쓴이의 고민도 엿보인다. “지난날 독재와 법치 유린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다시 권력의 정점에 있다. 강자들이 법을 집행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법이 중요하지 않다. … 검찰 간부들은 맘껏 성추행을 누릴 권리도 있다. ‘바바리맨’ 전 제주지검장을 보라. 검사들은 잘못을 저질러도 좀처럼 심판을 받지 않았다.” (P.146) 주진우 기자는 “법치주의를 지키려면 참여해야 한다. 분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이야말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생존하는 진짜 해법이다.



-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