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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악마'였고 국민은 '천사'였다

irene777 2015. 4. 11. 05:12



국가는 '악마'였고 국민은 '천사'였다

세월호 참사는 '현대판 부관참시'... 삶은 거래가 아니라 나눔이다


- 오마이뉴스  2015년 4월 7일 -





▲ 국민 여러분께, 삼보일배 올립니다 세월호 참사 발생 353일째인 3일, 고 이승현(단원고)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이아름씨는 '40일째' 삼보일배를 이어갔다. 2월 23일 진도 팽목항에서 출발한

부녀는 이날 오전 9시 전남 나주 금천면의 한 주유소에서 출발해 오후 6시 남평읍 인근까지 

약 8km를 이동했다. 팽목항~광화문 약 500km 고행길 중 이날까지 약 150km를 움직였다. 

세월호 모형 뒤로, 삼보일배 행렬이 이어져 있다.   ⓒ 소중한



도대체 우리 역사상 이런 일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사람의 귀중한 생명이 서서히 종말을 고해 가는 피 말리는 장면이 올림픽 경기 생중계방송 하듯이 TV 화면에 파도처럼 넘실거려도, 정부는 태연했다. 국가적 참상이 터졌음에도, 심지어는 국가의 최고수반인 대통령조차 7시간 동안이나 오리무중이기까지 했을 정도다.


정부는 참으로 대범하게 팔짱만 끼고 있었다. 자기 나라의 백성들이, 그것도 가슴 아픈 꽃다운 이팔청춘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도 태평스럽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참혹한 시신으로 되돌아온 후에조차도 정부는 역시 초지일관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파렴치의 극치


파렴치의 극치였다. 그런 탓에 '몰살'이니 '학살'이니 하는 가슴 쥐어짜는 통탄과 통곡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음에도, 여태껏 선체 인양작업조차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과 고사 직전의 특별조사위원회 참상이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국가가 내동댕이친 아까운 자식들 때문에 울부짖는 유족들을 국가가 또 새로이 울부짖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대판 부관참시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한때 난생 처음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촌뜨기 미국 생활을 하필이면 끊일 새 없이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로 시작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곳 생활에 정통한 한인 교수 한 분이 오금을 박듯 지극히 인도주의적인 충고부터 간곡하게 내지르는 게 아닌가. 밤 10시 이후에는 가급적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다고 …. 하여간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사이렌 소리와 정답게 동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끊임없는 경찰 차 사이렌 소리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는 공식적인 경고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사이렌을 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급한 순간에 맞닥뜨려도 성인군자답게 태연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은 역시 선진대국이었다. 사이렌을 울려야 하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울렸다. 미국은 사회적 위기에 대한 국가적 대응체제를 거의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동시에 이 사실은 미국 사회가 - 사이렌을 끊일 새 없이 울려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 일상적인 불안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국가는 굳세게 버티고 있으나, 사회는 눈코 뜰 새 없이 불안스레 요동치고 있다는 말이다. 요컨대 미국의 국가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건투하고 있으나, 미국의 사회는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상습적인 지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식 사이렌의 명암


미국에서는 "당신을 고소하겠다"(I will sue you)는 말이 인사말보다 더 자주 들려오는 듯했다. 어느 통계를 보니, 1990년대 초반 한해 동안의 소송건수가 무려 2억 건에 달했다. 미 국민 1인당 1년에 거의 한 건씩 소송을 제기한 셈이다. 흔히 미국을 '변호사 천국'이라 일컫는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시민의 어려움과 이해관계를 자발적으로 옹호하고 대변해줄 자율적인 사회운동 단체라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이들이 앞장서서 변호사를 대신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개인이 있다면, 어디에 가장 먼저 호소하게 될까. 가장 손쉽게 의논하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또 신뢰할 만하게 법적인 문제를 성실히 처리해 주는 변호사밖에 없지 않겠는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의 법치주의는 '법 만능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미국이 성립한 이래 오직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정치세력이 서로 번갈아 가며 나라를 지배해왔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으로 채색된 개인주의가 사회를 물샐 틈 없이 장악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개인주의라는 것은 사실 힘센 개인이 최고라는 현실 인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셈이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돈독한 관심과 배려에 원천적으로 등한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 마디로 개인주의는 '거인주의'다. 곧 '힘센 놈이 최고'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만이 굳세게 기승을 부리니, 사회는 개인과 개인의 끊임없는 상호경쟁과 충돌로 피범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탓에 미국에서는 끈끈한 인간적 결속과 유대를 찾아보기 힘들다. 


거칠게 말해도 좋다면, 미국엔 국가는 엄존하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 한국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나, 사회는 엄존한다. 바로 세월호 대재앙이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입증해 주었다. 이 사태는 거의 혁명적 파국에 가깝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핵심 영역들이 은닉하고 있던 비리들을 일거에 까발려버린 일대 역사적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가와 정부, 특히 국정원과 경찰, 언론계, 종교계, 법조계, 교육계 등등, 전체 국가 기간체제의 내면에 음습하게 암약하고 있는 독버섯 같은 모순과 부조리들을 한 칼에 들춰 내버린 것이다.



국가는 '악마'였고 국민은 '천사'였다


이처럼 미국과는 정반대로, 우리에게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국가가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도탑고 선량한 우리 국민들을 튼실하게 이끌어줄 참다운 국가적 영도집단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가 국민을 괄시하고 박해하는 현실이다. 우리 국가의 주도세력들이 무능하고 볼썽사납기 때문이다. 이런 지배세력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격퇴되거나 자퇴해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7시간 정도 실종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단종(斷種)되어야 온당하리라는 말이다.


하지만 또 미국과는 크게 차이가 나게,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공동체적 유대와 인간적 제휴의 손길들이 넘쳐났다. 비극의 현장에서 묵묵히 희생자 가족들의 곁을 지키며 참사 수습을 도왔던 연인원 5만 5천여 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들이 국가를 대신했다. 10대 학생도 있었고, 70대 노인도 있었다. 세월호 가족들은 이들을 '소리 없는 천사'라고 불렀다. 국민성금이 자그마치 1300억 가량이나 모였을 정도다. 국가는 악마였고, 국민은 천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던 부모들의 참담한 심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홍손인간?


세계화의 열풍과 신자유주의가 범 세계적으로 막강하게 위세를 떨치는 통에, '왈짜'들의 사익이 공익을 짓누르고 당당히 개선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를 조장하는 시장주의가 강화되면서 자본주의적 물신숭배와 황금만능주의가 인간성을 궤멸시키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심각한 병충해가 만연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가 앞장서서 인륜적 가치보다는 경제성장을, 상호협력보다는 경쟁을, 그리고 공동체적 단합보다는 개인적 사익과 업적을 더욱 열렬히 기리는 조악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서로 감싸 안는 인간적 화합의 몸짓이 아니라, 경쟁적 이기주의가 더욱 엽기적으로 좌충우돌하는 듯하다. 


다른 한편, 우리는 '홍익인간' 정신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이념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홍익인간은 본래 '신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우리 민족은 이 사상을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여겨왔다. 


그리하여 '나'라는 개인보다는 내가 속한 공동체인 '우리'의 이로움을 우선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세계관이 배태되었다. 이런 습성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서도, 그 흔적이 쉽게 나타난다. '나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나라이며,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라고 말한다. 남편들이 자기 부인을 말할 때도 '우리' 마누라라고 한다. 이 말을 엄밀히 따져보면 한 부인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것처럼 들린다. 문법적으로는 분명히 틀린 말이지만, 홍익인간 사상이 낳은 언어적 표현임을 이해한다면, 이는 결코 되바라진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우리의 이러한 숭고한 '홍익인간' 정신이 '인간을 널리 손해보게 한다'는 뜻의 '홍손인간'(弘損人間)'으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결과적으로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평등과 유기적 연대에 똬리를 튼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이 자기중심주의 및 이기주의에 의해 송두리째 침식당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윽고 '힘센 놈이 최고' 식의 자본주의적 자유경쟁 원리가 우리의 온화했던 공동체적 상부상조 정신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현실에서 삶은 '거래'(trade)가 아니라 '나눔'(share)이라는 사실을 더욱 절박하게 되새겨야 할 듯하다.



- 오마이뉴스  박호성 기자 -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6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