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과 자화상

irene777 2015. 7. 30. 16:18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 모음

 


전생에 자신은 황후였다는 여자가 있습니다.

소녀 시절에 스스로 지어 붙인 “경자”라는 이름을 자신의 본명인 “천옥자” 앞에 두었지요. 그 뒤 그 이름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 외로움들을 신비롭게 표현할 줄 아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여류화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어려서부터 독특한 감수성을 가지고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녀가 자랄 당시 대부분의 여자는 소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일제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천 화백은 교육과 문화에 열린 가정환경 덕분에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지요. 고등학교를 마칠 때 즈음 집안에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을 공부하고 싶었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물론 집안의 반대가 심각하였지요. 천 화백은 정신병자 흉내를 내면서까지 부모님께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습니다. 미친듯이 웃다가, 울기도 하고, 중얼거리면서 집안을 돌아다녔지요. 결국 부모님은 허락하셨고, 그녀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동경여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천 화백은 유학 중 만난 남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다시 신문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을 만났지만 곧 헤어졌습니다.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쉽지 않았던 인생의 고개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 쉽게 식지 않는 예술혼을 잉태한 것입니다.

 

“나물 캐러 갔던 동네 소녀가 허리띠인 줄 알고 꽃뱀을 집으려다가 물려 죽은 일이 있었어요. 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끌리는 그 장면이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남아 언제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지요. 그러나 내가 처음 그린 뱀은 꽃뱀이 아니라 한 뭉텅이의 푸른 독사였어요.”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그녀가 자신의 삶에 저항하기 위해 택한 소재가 뱀이었습니다. 그녀는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뱀에 대한 이미지를 탄생시켰습니다.

6.25로 인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천 화백은 그 곳에서 자신이 그린 뱀 그림 전시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뱀을 그렸다’면서 신기해하였구요. 그것이 “천경자”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한 것입니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꽃과 여인입니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것이 꽃과 여인이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아름다움이 주로 보여지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외롭기도 하고 슬퍼보이기도 하지요. 고독의 미와 아픔의 성숙이 천경자의 예술을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던 1974년, 18년간 재직하던 홍익대 교수직을 버리고, 문득 천 화백은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남태평양과 유럽, 남아메리카까지 계속되었지요. 그곳을 돌아보고 그 여행에서 느낀 선명한 색감과 원시적 인상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반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보여졌던 안타까운 인간의 또 다른 모습들을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에 비추어서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얼마 전이었던 1991년 천 화백은 힘든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의 “미인도”에 대한 진품 시비 사건 때문이지요. 천 화백은 끝까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많은 감정사들이 그녀의 작품이라고 판결하였고, 입장이 난처해진 미술관에서도 천 화백의 작품이라 주장하였지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천 화백은 자신의 작품들을 서울 시립 미술관에 기증하고, 큰 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뒤 진품 위조 사건은 범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천 화백은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은 채 지금도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중남미를 여행하고 있다고 하네요.




▲ [ 자살의 미 (1968) ]



누구보다 많은 열정을 품었기에 또한 그만큼의 한(限)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여인. 그녀의 인생에 자살이란 단어가 들어왔을 때 느꼈던 나름대로의 차가운 미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잿빛 푸른 색으로 그려진 꽃과 구름으로 자살이라는 가장 극한 감정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 [ 청춘의 문 (1968) ]



천경자 화백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 중 하나 이지요. 죽은 사람인양 회색빛 여인의 얼굴은 꿈을 꾸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그녀의 얼굴은 전통적 한국 여인과는 다르지요.

환상적인 여인의 얼굴과 분위기에서 천화백이 바라는 이국에의 동경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천 화백의 꿈이자 이상인 듯 합니다.




 [ 꽃과 나비 (1973) ]



한 무더기 아름답고 화려한 꽃다발 아래에 반라의 여인이 한가롭게 누워있습니다. 그녀의 피부색은 그녀가 여기 한국의 사람은 아니라고 느끼게 하고 있네요.

그리고 화려한 공작새와 꽃들도 먼 이국의 정서를 물씬 풍기게 합니다.

여느 천 화백의 그림처럼 색감과 구성이 화려합니다.




▲ [ 이탈리아 기행 (1973) ]



1960년대 말에 시작된 천 화백의 유랑은 많은 작품의 소재를 만들었습니다. 1969년에 갔던 이탈리아에 대한 감흥을 3년 동안 이 작품으로 완성하였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열었던 보티첼리의 그림과 멋진 건축물이 찍힌 사진, 여인의 장갑 그리고 양주병과 꽃으로 화폭을 채웠습니다. 몇 안 되는 소재들이지만 화려하게 표현된 이 작품으로 그녀는 자신의 느낀 이탈리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 孤 (1974) ]



머리에 가득 꽃을 꽂은 이 여인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 큰 눈과 처연한 입술의 끝은 한없이 슬퍼 보입니다. 무심한 듯 허망한 듯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그녀의 짙은 피부색보다 더 내 가슴을 더 막막하게 합니다. 늘상 외로움을 품고 살았다는 천화백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덧입혀주었습니다.




▲ [ 사월 (1974) ]



1974년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그린 그림 속 갈색 피부 여인의 머리칼에는 연보랏빛 등꽃들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사월의 신비로움과 화사함이 꽃잎 끝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네요. 강렬한 호랑나비의 무늬보다 여인의 연보랏빛 입술에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왜일까요.




▲ [ 인도 올드 델리 (1979) ]



올드 델리는 수 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많은 성곽들과 모스크,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인도의 오래된 도시입니다.

우리의 옛 시골 장터처럼 형성된 올드 델리 길가의 사람들의 모습을 풍경화로 담아내었네요. 인도의 전통 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이국적 정서를 느끼게 됩니다.




▲ [ 두상 (1982) ]



너무나 강하고 화려하여 슬프고 애처로운 이 그림은 천경자 화백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지요. 그녀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슬픔의 애상에서 시작된 것임을 뼈 속 깊이 사무쳐 느끼게 하지요. 쏟아지는 꽃비 속, 처연한 눈망울의 여인은 차가와 보이지만 사랑이 필요한, 누군가를 바라고 있는 천 화백의 또 다른 얼굴인 듯 합니다.

 


출처 : 아트 옥션

http://cafe.daum.net/artAuction/ZbK/15

 





속된 자본주의는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은 시장에서 얼마 정도의 수준에서 거래 될까요?  아래 그림은 2011. 7. 한국 그림 경매에서 최고가인 4억5천만원에 낙찰된 천 화백의 작품입니다.




▲ 천경자, 1972년 정글 속에서 (베트남) / 20110721 아시아경제 4억5천만원

 

 


<작가가 그린 자화상> 화가 천경자 ‘남도의 진득한 서정’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1.21. 14:26

 


화사한 남도 잡가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간드러지게 넘어가는 곡조가 멋을 부리더니 어느덧 흐느끼는 울음으로 변해 굽이굽이 한을 남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도소리를 많이 듣고 그 소리가 귀에 배어 지금까지 좋아한다. 내 감수성은 성장해서 보다 유년시절에 더 강해 그때의 자연과 인정이 더 뚜렷이 머릿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같은 인간성이 요즘같은 사나운 사바를 헤쳐 나가기엔 비상한 노력이 필요한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내가 화가라는 점일 것이다.


나는 그림을 구상할 때마다 오랜 시간을 처음으로 내 시각 속에 배인 자연의 푸른 빛깔이라든지 무슨 꽃인지 하얀 꽃들의 인상을 쫓아 황홀한 행복을 느끼고, 그 무렵의 아름다운 인정을 그리워하고 비가 내리거나 함박눈이 내리는 날, 산과 마을이 희뿌연 회색으로 물들어가던 때를 떠올리며 행복감을 느낀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빨갛게 핀 영산홍 앞에서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노류장화를 꺾어들고…"하는 애조의 콧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는 그 시대의 하이칼라풍(서양풍으로 치장하는 것)에 마음이 끌려 어느 유치원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꼭 구경을 갔고, 그 희게 너울거리는 면사포와 하얀 구두굽을 볼 때마다 무한히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내 작품에 그 신부와 멋장이 신사의 화신같은 게 많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도 노래는 남도 잡가가 좋다. 내 생활에 배인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국노래가 다 싫다는 건 아니다. 아르헨티나 탱고나 스페인 민요, 아일랜드 창가곡도 좋다.


이제 봄이 올 것이다. 내 고향 고흥 땅에는 하얀 오랑캐꽃이 피고, 참꽃도 애처롭게 피어날 것이다. 건넌뱅이 언니 등에 업혀서 본 살구나무도 다시 연분홍 꽃을 피울 것이고. 꽃을 좋아하던 할아버지 덕분에 뜰 가득 환하게 꽃이 피어있던 옥하리 외가 초가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짜야, 짜야' 부르시던 외할아버지, 귀염머리 땋아주시던 외할머니. 밥도 맛나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도 재미나던 옥하리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 나이 어느새 여든이 넘었다. 그동안 여기저기 세상 구경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전시회도 몇 번 열었다. 이제 내게 남은 힘이 없다. 지나간 일만 생각날 뿐이다. 그리고 내게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 천경자 저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중에서 발췌 >


▶ 천경자화백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명인 천경자화백(86)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채색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가 남긴 강렬한 눈빛의 여인상은 굴곡진 삶을 살아온 작가의 분신이다. 천 화백은 글솜씨 또한 남달랐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스케치화도 여럿 남겼다.


정리=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천경자

千鏡子

1924. 11. 11, 전남 고흥


<브리태니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20c2070a


<인물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X33222



<위키백과>

천경자(千鏡子, 1924년 11월 11일 ~)는 대한민국의 동양화가, 수필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생애)

1924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나 전남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44년에 도쿄 여자 미술 대학(女子美術大學)을 졸업하였다. 1946년에 첫 개인전을 광주여자고등학교의 강당에서 가진 후, 많은 전시회를 가졌다.[1] 1965년 동경 이도 화랑(畫廊)에서 개인전을 열고,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했다. 1955년에는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2]

1998년에는 자신의 작품 90 여 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3]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 천경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천경자가 기증한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소장품과 아트상품 등이 갖추어져 있는 천경자전시관이 개관되었다.[4]

1998년 미국으로 이주해 200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천경자의 행적이 묘연하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자 생존여부에 관해 미스테리라고 표현하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출처 : http://blog.hani.co.kr/nomusa/68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