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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대도무문’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긴급 보도

irene777 2015. 12. 2. 15:44



뉴욕타임스

‘대도무문’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긴급 보도


- 정상추 / 뉴스프로  2015년 11월 22일 -




뉴욕타임스, ‘대도무문’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긴급 보도


– 지난 22일,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 향년 87세

– 김영삼 전대통령 정치 인생 재조명

– 군 세력 축출, 투명한 금융거래 개혁, 전두환 유죄 확정 등 치하

– IMF 구제금융 및 아들 금융비리로 인해 정권 이양 등 굴욕 비판


“대도무문-정도(正道)에는 거칠 것이 없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정치적 명언을 남기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거대한 족적을 남긴, 무엇보다 30여 년의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 시대를 창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으로 서거했다. 향년 87세.


뉴욕타임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서울발로 긴급 보도하며 그의 정치적 족적을 상세히 보도했다.


신문은 문민정부의 탄생과 정치에서 군 세력 축출 및 투명한 금융거래 개혁 등을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치하했다.


신문은 1927년생인 김영삼 전대통령이 26살에 국회에 입성하여 독재자 박정희를 향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많은 추종자자 그룹을 모았고 이로 인해 독재자 박정희로부터 수많은 정치적 탄압을 받은 사건들과 독재자 박정희 암살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박정희 추종자이자 또 다른 군부 독재자인 전두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고역을 당한 사건들을 상세히 그리고 담담한 문체로 서술했다.


또한 신문은 김영삼 전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관계를 ‘라이벌’로 규정했다. 1987년 대선시 정권 창출을 확신했던 야당이 집권에 실패한 이유를 두 라이벌의 경쟁으로 비판했으며, 결코 좁혀질 수 없었던 라이벌의 극단의 대립으로 인한 삼당합당과 김영삼 전대통령이 추진하던 남북 정상회담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이 되어버린 사연도 소개했다.


무엇보다 신문은 김영삼 전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과의 정치적 야합을 조명하며 그 안에 숨겨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을 소개했다. 정치적 야합으로 인해 1992년 문민정부가 탄생했고 이후 김영삼 전대통령이 보여준 정치적 결단, 예를 들어 하나회 숙청, 독재자 노태우 전두환 유죄 판결 등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의 결과물이라고 신문은 분석하고 있다.


임기 동안 자신에게 주어졌던 ‘김일성과의 남북 정상회담’ ‘북한 폭격’ 등의 많은 기회들 상실했던 점을 김영삼 전대통령이 아쉬워했음을 신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통해 부각했고, 임기 말 국제금융기구(IMF) 긴급구제금융, 아들의 부정부패혐의, 임기 말 지지율 급락 등으로 야당인 김대중 정권에 권력을 넘긴 일들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굴욕으로 보도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뉴욕타임스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nyti.ms/1QB9JIU




Kim Young-sam, Former President of South Korea, Dies at 87

김영삼 한국 전 대통령 87세로 서거


By CHOE SANG-HUNNOV. 21, 2015




▲ Kim Young-sam waving during a parade on Feb. 25, 1993, in Seoul, after being sworn in 

as South Korea’s 14th president. Credit Yonhap/European Pressphoto Agency


1993년 2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퍼레이드에서 손을 흔드는 김영삼 전 대통령.



SEOUL, South Korea — Kim Young-sam, the former president of South Korea who replaced the last of the country’s military leaders, purged politicized generals and introduced a landmark reform aimed at transparency in financial transactions, died on Sunday. He was 87.


한국 서울 – 한국의 마지막 군 출신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정치에 관여하는 군 장성들을 축출했으며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목표로 획기적인 개혁을 시작했던 김영삼 한국 전 대통령이 일요일 서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87세였다.


Mr. Kim, who was president from 1993 to 1998, died of septicemia and heart failure, said Oh Byung-hee, the chief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where Mr. Kim was admitted with a fever on Friday. He had been treated for a series of strokes and pneumonia in recent years.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금요일 발열 증세로 입원했던 서울대 병원 병원장 오병희 씨는 1993년에서 1998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으로 서거했다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근 몇 년 동안 몇 차례의 뇌졸중과 폐렴으로 치료를 받아왔다.


Mr. Kim, an outspoken critic of military dictators from the 1960s through the 1980s, was one of the “three Kims” — the others were former PresidentKim Dae-jung and former Prime Minister Kim Jong-pil — who played major roles, often relying on regional support from their home provinces, during South Korea’s turbulent transition from dictatorship to democracy.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집권한 군 독재자들에 대한 기탄없는 비판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이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되던 험난한 시기에, 종종 연고지의 지역적인 지지 세력에 의존하며 주요한 역할을 했던 “3김” 중의 하나 -나머지 둘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였다.


Mr. Kim was born in 1927, a son of a rich anchovy fisherman on Geoje Island, off the southeast coast of South Korea, during a time when all of the Korean Peninsula was a Japanese colony.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반도가 일본 식민지였던 1927년, 한국 남동 해안의 거제도에서 부유한 멸치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He was elected to Parliament at age 26 and developed a following as an opposition leader famed for his daring criticism of Park Chung-hee, who seized power in a coup in 1961 and tortured and imprisoned dissidents before his assassination in 1979.


김영삼 전 대통령은 스물 여섯 살에 국회에 입성했고,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1979년 암살당하기 전까지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감금했던 박정희를 향한 대담한 비판을 하며 야권의 지도자로서 많은 추종자가 그를 따랐다.




▲ Kim Young-sam in Vancouver on Nov. 22, 1997, shortly before 

his presidency ended. Credit Gary Hershorn/Reuters


1997년 11월 22일 대통령 임기만료 직전 벤쿠버를 방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



Mr. Park had Mr. Kim expelled from Parliament for criticizing his dictatorship during an interview with The New York Times in 1979. Mr. Kim’s colleagues resigned from Parliament in protest, and huge antigovernment demonstrations broke out in Mr. Kim’s political home ground in the southeast. Mr. Park was assassinated by his spy chief later that year.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독재를 비판했다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국회에서 제명했다고 밝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동료들은 이에 항의하며 국회의원직을 사퇴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남동 지역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 말 중앙정보부 부장에 의해 암살됐다.


Mr. Kim’s travails continued when Mr. Park was replaced by Chun Doo-hwan, an army major general who engineered a coup to fill the power vacuum left by his patron’s death. Mr. Kim was barred from politics and put under house arrest. He once staged a 23-day hunger strike.


육군 대장이었던 전두환이 자신의 후원자였던 박정희가 죽어 공석으로 남겨진 권력의 자리를 메우려 쿠데타를 도모해 대통령이 된 이후 김영삼의 고역은 계속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는 23일간 단식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Dawn will come even if the rooster is strangled,” he once said, a saying that became a catchphrase for Koreans’ yearning for democracy.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한국인의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담은 구호가 되었다.


Mr. Kim was as well known for a lifetime rivalry with Kim Dae-jung, a fellow opposition leader from the southwest Jeolla region. They both ran for president in 1987 in South Korea’s first democratic election and split the opposition vote, allowing Mr. Chun’s handpicked successor, Roh Tae-woo, another former army general, to win.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호남 출신의 동료 야당 지도자 김대중과의 일생을 걸친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남한의 첫 민주 선거였던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선주자로 경쟁하여 야권 표를 갈랐고, 이로 인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목한 후계자이자 육군 장군 출신인 노태우가 당선됐다.


In 1990, Mr. Kim merged his party with Mr. Roh’s military-backed governing party in a move widely condemned as a betrayal of pro-democracy forces. The merger was a political marriage of convenience: Mr. Roh wanted a parliamentary majority, and Mr. Kim, who distrusted Kim Dae-jung as much as he detested the military dictators, believed that he would never win the presidency as long as the other Mr. Kim competed with him for the opposition vote.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태우 군사정권의 여당과 합당을 했고 이 때문에 친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배신으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그 합당은 정치적 정략결혼이었다. 즉 노태우는 의회 다수를 차지하기를 원했고, 군부 독재자들을 증오한 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불신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권 표를 놓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경쟁하는 한 자신이 결코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고 믿었다.


Once in the governing party, whose top hierarchy included many former generals, Mr. Kim and his followers, vastly outnumbered by rival factions but all seasoned veterans in party politics, quickly expanded their ranks and dominated the party.


많은 전직 장군들이 최고위직을 맡고 있던 집권당에 일단 들어가자 수적으로는 경쟁 파벌에 밀렸지만 정당 정치에 노련한 베테랑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은 빠르게 자신들의 지위를 확대했고 당을 장악했다.


Mr. Kim beat Kim Dae-jung in the 1992 election to become the first civilian leader in South Korea in more than three decades.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기며 30여 년 만에 한국의 첫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다.


Although he won the election with the support of the military-backed party, Mr. Kim did not forget his roots. He purged a clique of politically ambitious army officers who went by the name Hanahoe, which roughly meant “an association of one-for-all, all-for-one.” Bound by their regional prejudices and sponsored by the military dictators, the members of the group were so powerful they blackmailed — and even beat up — members of Parliament. The officers were forced to retire.


비록 군부를 등에 업은 정당의 지지로 선거에 승리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그는 대략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의 연합”을 뜻하는 하나회라는 이름으로 통하던 정치적 야망을 가진 군 장교들의 파벌을 제거했다. 지역감정으로 뭉치고 군부 독재자들의 후원을 받았던 그 조직의 회원들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국회의원들을 협박했고 심지어 구타까지 했다. 그 장교들은 강제로 전역됐다.


Mr. Kim’s military purge culminated in the arrest and conviction of Mr. Chun and Mr. Roh on mutiny and corruption charges for their roles in the 1979 coup and a bloody crackdown on a pro-democracy uprising in the following year, as well as for collecting hundreds of millions of dollars each in bribes from businessmen. (Mr. Kim later pardoned them and released them from prison.)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군부 숙청은 기업가들로부터의 수억 달러의 뇌물 수수와 1979년 쿠데타에서의 역할 및 다음 해 민주화 봉기에 대한 유혈진압 등을 이유로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를 반란 및 부패 혐의로 체포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후에 그들을 사면했고 석방시켰다.)




▲ Kim Young-sam dragged off by plainclothes policemen in Seoul in 1986. Mr. Kim 

was outspoken critic of military dictators from the 1960s through the 1980s. 

CreditHeesoon Yim/Agence France-Presse — Getty Images


1986년 서울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복 경찰들에 의해 끌려가는 모습. 김 전 대통령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군사 독재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사진 임희순/AFP–Getty Images)



Mr. Kim also barred South Koreans from owning bank accounts under pseudonyms. That change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mportant landmarks in South Korea’s long-running campaign against corruption; bank accounts under borrowed names had been widely used by politicians and businessmen to hide slush funds.


김영삼 전 대통령은 또한 한국인들이 차명으로 은행계좌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한 변화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자 한국이 오랜 기간에 걸쳐 시도해온 정책 캠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의 하나로 여겨진다. 차명으로 된 은행계좌들은 비자금을 숨기기 위해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에 의해 폭넓게 이용되고 있었다.


But Mr. Kim’s time in office was also marked by missed opportunities.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시기는 또한 많은 기회를 놓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In his memoir, Mr. Kim said he persuaded President Bill Clinton to cancel the United States’ plan to bomb North Korea’s nuclear facilities in 1994 for fear of war.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전쟁의 공포 때문에 북한 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폭격 계획을 취소하도록 빌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Looking back,” Mr. Kim said in an interview in 2009, “I think the North Koreans think they can say whatever they want because no matter what they do, the Americans will never attack them.”


김영삼 전 대통령은 “되돌아보면, 북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미국은 결코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나는 본다”고 2009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The 1994 nuclear crisis was defused when former President Jimmy Carter met with the North Korean leader at the time, Kim Il-sung, in Pyongyang, the North’s capital, and brokered what would have been the first summit meeting between the leaders of the two Koreas. But Kim Il-sung died of heart failurein July 1994, two weeks before the meeting was scheduled to take place. ”Fate played a trick on me,” Mr. Kim said. “If I had met Kim Il-sung, I would have changed the nation’s history.”


1994년 핵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 수도인 평양에서 당시 북한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남북한 지도자 간의 첫 번째 정상회담을 중재하면서 진정되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정상회담이 잡혀있던 2주 전인 1994년 7월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운명이 나에게 장난을 쳤다”며 “만일 내가 김일성과 만났더라면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꿔놓았을 것이다”라고 김 전 대통령은 말했다.


The achievement that had eluded him — becoming the first South Korean leader to hold a summit meeting with the North — went to his rival and successor, Kim Dae-jung. In 2000, Kim Dae-jung flew to Pyongyang and met with Kim Jong-il, Kim Il-sung’s son and successor. That year, Kim Dae-jung was awarded the Nobel Peace Prize.


그를 비켜 갔던 그 업적-북한과 정상회담을 한 첫 한국 대통령이 되는 것-은 그의 경쟁자이자 후임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다. 그 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By the time Kim Young-sam ended his five-year term in early 1998, he was a sad, disgraced lame duck.


5년 임기가 끝날 무렵인 1998년 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슬프고 불명예스러운 레임덕에 빠져 있었다.


In 1997, South Korea’s proud economy swallowed the humiliation of a $58 billion bailout from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during the Asian financial crisis. Mr. Kim was criticized for failing to prevent the crisis by overhauling the country’s powerful family-run conglomerates, which had expanded on reckless borrowing and with cozy ties to the government.


1997년 한국의 자부심이었던 경제는 아시아 금융위기 동안에 국제금융기구(IMF)로부터 580억 달러의 긴급구제를 받는 굴욕을 삼켜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무모한 차관과 정부와의 유착 관계를 이용해 확장을 계속하던 한국의 강력한 가족 경영 대기업들을 개혁하지 못해 그 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With thousands of people losing their jobs, Mr. Kim stopped jogging in the early morning, a daily routine that he had never missed until then.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김 전 대통령은 당시까지 매일 한 번도 거르지 않던 이른 아침 조깅도 그만두었다.


Mr. Kim’s reputation was further tarnished with the arrest of a son on corruption charges. His governing party was so unpopular that South Koreans were ready to hand over power to the opposition for the first time, as they did with the election of Kim Dae-jung in late 1997.


아들이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더욱 손상됐다. 그의 집권당은 지지율이 심하게 떨어져서 한국인들은 1997년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며 처음으로 야당에 권력을 넘겨주었다.



[번역 저작권자: 뉴스프로, 번역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출생에서부터 서거까지 연보]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출생

▲1947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입학

▲195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장택상(張澤相)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 입문. 손명순 여사와 결혼(슬하에 2남 3녀 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거제에서 만25세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이후 5,6,7,8,9,10,13,14대 등 국회의원 9선). 3선 개헌에 항의해 자유당 탈당. 민주당 창당 참여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했다 낙선

▲1960 어머니 박부련 여사 북한 고정간첩에 의해 사망.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63 군정연장 반대집회·가두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23일간 수감. 제5대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당선을 위해 민정당 대변인 활동.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64 민중당 창당 참여

▲1965 민중당 원내총무 선출(최연소 원내총무)

▲1967 신민당 창당 참여. 신민당 원내총무 선출(5년간 5선, 최다선 원내총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69 박정희 대통령 3선개헌 반대투쟁 주도하다 초산테러 당함

▲1970 40대 기수론 제창. 제 7대 대선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출마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72 유신 선포에 미국에서 급거 귀국해 가택연금 당함. 반유신투쟁 전개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대정부질의에서 박정희정부 테러행위 규탄

▲1974 신민당 총재 선출(만45세 최연소 야당총재)

▲1975 박정희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79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선출.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때 경찰에 강제 연행. 법원 결정에 의해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 정지. 국회의원직 제명

▲1980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3년간 불법 가택연금 시작

▲1981 민주산악회 발족

▲1983 민주화 요구 단식투쟁(23일간)

▲1984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민추협 공동의장에 추대

▲1985 신한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 민족문제연구소 설립

▲1986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 전개

▲1987 신한민주당 탈당 후 통일민주당 창당. 6월 민주시민항쟁 주도. 통일민주당 총재. 제13대 대통령선거 출마(2위로 낙선)

▲1988 통일민주당 총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89 한국 정치인 최초로 소련 방문

▲1990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선언.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국구로 출마해 당선. 민주자유당 총재. 민주자유당 대통령후보 선출. 국회의원직 사퇴로 38년간 의정활동 마감.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1993 대통령 취임

▲1995 신한국당 총재

▲1998 대통령 퇴임

▲2003 유석 조병옥 박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2004 북한민주화동맹 명예위원장

▲2008 한국티볼협회 총재

▲2011 범국민안보공감캠페인 명예위원장

▲2015.11.22 서거




<출처 : https://thenewspro.org/?p=15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