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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구갑우 - 중국과 북한 ‘핵실험 50년사’

irene777 2016. 2. 2. 17:51



[정동칼럼]


중국과 북한 ‘핵실험 50년사’


- 경향신문  2016년 1월 23일 -





▲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 (정치학)



1964년 10월16일 중국은 첫 핵실험을 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핵 과점체제에 핵실험으로 맞서는 사건이었다. 10월17일 중국의 인민일보에 핵실험을 알리는 성명서가 게재되었다. 북한의 10월18일자 노동신문은 1면에 “중국에서 첫 핵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이란 기사와 함께 중국 정부의 ‘성명’을 번역해 전재했다. 북한은 중국의 핵실험이 중국의 조국보위와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라 평가했다. 중국 정부의 성명은, 미국의 핵위협 때문에 핵실험을 했지만, 핵무기의 선제사용은 하지 않을 것이며, 핵무기의 폐기를 위해 노력한다는, 세 가지 논리로 구성돼 있었다.


북한의 ‘환영’은 외교적 의례를 수반할 정도였다. 북한은 내각수상 김일성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 최용건 명의로 중국 지도부에 ‘축전’을 보냈다. 10월19일 노동신문 사설에는 중국의 핵실험이 ‘부득이한 자위적 조치’였다는, 정당화도 등장했다. 1949년 8월29일 소련이 핵실험을 하고 한 달이 지난 후 그 사실이 공개되었을 때, 북한은 국가 수립 이전부터 수입품으로 간직했던 반전·반핵에서, 소련의 좋은 핵과 미국의 나쁜 핵이라는 이분법으로 이동한 바 있다.


그러나 1962년 말 소련과 미국이 쿠바를 매개로 핵무기 치킨게임을 했을 때 소련이 후퇴하자, 1961년 소련과 체결한 동맹이 제공하기로 했던 핵우산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발간된 북한의 소설 <운명>에는, 김일성이 중국의 핵실험 보고를 접한 직후, 이른바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결정한 1962년 12월의 회의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국의 안보를 위해 경제보다 국방에 투자하겠다는 결정이었지만, 병진노선의 부정적 효과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핵실험은 북한에 한 대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중국의 첫 핵실험 전야인 1963년쯤 중국과 북한은 반미는 물론, 미국과 평화공존을 지향하려는 소련의 정책을 비판하는 이해관계의 공유가 있었다. 1963년 8월 미국, 영국, 소련이 지하 핵실험만을 인정하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합의했을 때, 북한은 핵 보유국가들이 추진하는 핵확산 금지정책이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핵 보유를 막기 위한 공모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1965년 5월14일, 중국이 첫 번째와 같은 논리로 그리고 ‘평화애호국가들’과 핵무기의 완전 금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명분으로 두 번째 핵실험을 했을 때도, 북한의 김일성은 축전을 보냈다. 1967년 6월17일 중국은 첫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그러나 북한의 축하 정도는 상대적으로 절하됐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에 진입하고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살찐 수정주의자’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북한은 과학원에서 축하를 보내는 정도였다. 1970년대 중후반까지 북한의 노동신문에는 중국의 핵실험 보도가 계속됐다.


2016년 1월6일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고 발표했을 때, 2006년 10월6일 첫 핵실험을 했을 때, 북한이 발표한 성명서는 기시감(旣視感)을 갖게 한다. 2006년 10월의 북한 외무성 성명은, 미국의 적대시정책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느껴 핵을 개발했지만 종국적으로 핵폐기를 위한 핵개발이라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2016년 1월 북한의 정부 성명에서도 미국의 핵위협에 따른 자위적 조치이고, 경제제재와 인권을 매개로 한 체제 전환 시도에 대한 대응이며, 자신들이 ‘평화애호국가’이기 때문에 핵 선제공격과 핵확산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이 유지되는 한, 핵개발 중단이나 포기는 없다는 언급이 과거와의 차이다. 중국이 핵실험을 했을 때와 거의 같은 주장이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했을 때, 중국은 북한이 “터무니없게 핵실험”을 했다고 비난했고, 2016년 1월에도 북한의 핵실험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기시감의 원천인 1960년대 초반과 달리 탈냉전시대에 북한과 중국의 이익 교집합이 최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2016년 1월 이후에도 ‘핵확산 방지’를 포함한,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이 ‘공동이익’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2005년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이 제시한 것처럼,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교환하는 공식은 최소의 공통분모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준비되고 있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와 예정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다시금 6자의 공동이익의 분기인가 구성인가를 묻게 될 것이다. 역사의 쓸모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의 전망을 공유하게끔 할 때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42013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