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시시각각]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 중앙일보 2016년 1월 26일 -
▲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
『참회의 증언』이란 회고록이 이달 초 세상에 나왔다. 저자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하 경칭 생략). 그는 지금 서산-태안의 새누리당 예비 후보다. 이 책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의 단초가 됐던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등장한다. 그 세무조사로 한상률은 자신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정권까지 살아남으라”고 했던 노 전 대통령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한상률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세무조사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부정한다. “그는 한때 정치적 세무조사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검찰 고발도 피해 보려 했다.” 이상득 의원과 롯데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일화도 꺼낸다.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를) 꼭 고발까지 해야 했느냐” “정치적으로 오해를 받을 텐데…”라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무조사는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한상률은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논리를 편다. “쏟아지는 탈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국세청의 정보 시스템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막을 상황도 아니었다.” 박연차 게이트에 대해 그는 2004년 했어야 할 세무조사를 못해서, 참여정부의 청와대가 측근 기업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한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부족함을 반성하는 참회”보다 “억울함을 밝히는 증언”에 기울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현실로 돌아오자. 이명박 정부 고위급 인사들에 대한 무더기 계좌 추적도 ‘자연발생적인’ 상황일까. 검찰은 첫 보도가 나온 직후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조회 사실을 인정했다. 석유공사의 캐나다 업체 인수 의혹 수사→피고발인 아버지인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계좌 확인→김 전 기획관과 거래가 있던 인사들의 계좌 조회→혐의 없음 확인 후 중단의 수순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몇 사람 계좌만 까 봐도 관련성 여부를 알 수 있을 터. 50명 넘는 이들의 계좌를 왜 들여다본 것일까. 전직 장관들 계좌를 조회하는 데 수뇌부가 몰랐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더 놀라운 건 이 전 대통령 측 반응이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주 퇴임 후 첫 공개 강연에서 “나는 청렴하고 부끄러움 없이 국가를 경영했다. (측근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 뒤져봐도 깨끗하니까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측근들에게는 “고위 공직자 계좌 조회는 굉장히 신중하게 하는데, 이번 경우는 아주 이상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가 청와대에 있을 때 그의 일부 수족들은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 노 전 대통령 수사 논란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은 지난해 2월 경향신문 기자에게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 보도는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 전 대통령이 떳떳할 수 있는 건 왜일까.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이 중간에서 바보가 됐을 가능성을 거론한다. “병풍 뒤에서 이명박 청와대와 박근혜 청와대 사이에 당연히 모종의 카드가 오가지 않았을까요? 검찰 꼴만 우스워진 거죠.”
물음은 노무현은 왜 울어야 했고, 이명박은 왜 웃을 수 있느냐로 집약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인’ 과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건 음모론이 아니다. 합리적 의심이다. 한상률의 책은 “내가 이명박 대통령의 도곡동 땅 비밀을 가지고 딜을 하여 국세청장이 되었다거나, 박근혜 대통령의 뒷조사를 하여 이명박 대통령에게 가져다주고 국세청장에 유임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어처구니없다 ”고 주장한다. 그 내막 역시 그때 그 내부자들만이 알 것이다.
권력의 장막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 아닌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서글픔이 고드름처럼 마음에 맺힌다.
-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 -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19473535?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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