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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문명적 도착 ②

irene777 2016. 2. 12. 17:24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문명적 도착 ②


진실의길  김종익 칼럼


- 2016년 1월 28일 -





지금 국회에는 ‘테러방지법’이 계류되어 있다. <세카이> 2016년 1월호에 실린 이 글은 테러가 ‘테러방지법’으로 방지할 수 없다는, 너무나 명쾌한 해석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테러’라는 게 이른바 강대국과 그 강대국에 휘둘리는 국가들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테러의 민낯’은 바라보는 일은, 바로 식민지 시대의 식민지 종주국들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테러방지법’이 테러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테러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에 오싹 몸서리가 일어난다. ‘테러방지법’을 둘러싼 여러 논의가 있지만, 이 글은 테러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다른 방식의 통찰을 보여준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2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문명적 도착


니시타니 오사무 西谷 修

1950년생. 릿쿄 대학 문학연구과 특임 교수. 전공은 프랑스 사상, 비교 문명학. 

『불사의 wonderland』, 『‘테러’와의 전쟁』, 『이성 탐구』, 『파국의 prism』 등의 저서가 있다.





‘문명 세계’의 도착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 ‘무고한 시민에 대한 테러 공격’을 비난하는 성명을 재빠르게 발표하고, “이것은 단순히 파리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공격받은 것은 프랑스인만이 아니다. 전 인류가, 그리고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가 공격받은 것이다”라고 그 중대성을 강조했다. 이 표현은 형식적인 제스처가 아니다. 거기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기본적 성격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미합중국 대통령인 한 오바마도 부시도 다르지 않다.


15년 전, 미국의 ‘동시 다발 테러’ 사건에 즈음하여,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것은 전쟁이다!”라고 단정하고, 미합중국은 ‘전쟁’을 개시했다. ‘테러와의 전쟁’이다. 그때까지 전쟁이라면 기본적으로는 국가 간의 전쟁이고(식민지 전쟁은 당초는 반란 진압이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이윽고 그것이 ‘테러와의 전쟁’의 원형이 되었다), (전쟁 당사자의-역자) 자격으로서는 대등한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전쟁’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평가되며, 국가가 말하자면 사적 무장 집단을 상대로 ‘전쟁’을 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비대칭적 전쟁’의 상대(적)이 ‘테러리스트 집단’이다, 라고 간주되었다. ‘테러리즘’은 그때까지는 국내법으로 제재되는 범죄였지만, 그것이 국경을 넘어 국가를 표적으로 삼는 게 되었다는 데에서, 사건을 일으켜서 국제 질서를 침해하는 그 무장 단체에 대해서, 국가가 군사 행동을 일으키는 일이 선언되었다. 그때, ‘적’은 국가는 아니지만, 국경을 넘어서 어디에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나라에 있더라도 그 나라를 무시하고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미국은, 여러 국가에 대해 ‘테러리스트에 붙든가, 우리 쪽에 붙든가’라고 양자택일을 압박하며, 국경을 무시한 ‘전쟁’의 새로운 경계선을 그었다(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초강대국에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테러리스트’란 본디는 범죄 개념이다(거슬러 올라가면 발생은 프랑스 혁명 때에 이르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렇게 부르는 말에는 이미 단죄의 함의가 있다. 그러니까 ‘테러리스트’에 대한 ‘전쟁’은, 처음부터 ‘정의’의 집행으로 간주된다. 상대는 무권리자이고, 그들에게는 전투 행위 그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자격이기 때문에 교섭 상대로서도 인정되지 않고, 다만 부정되고 말소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거기에 반해, 이 ‘보이지 않는 적’을 박멸하기 위해, 국가 쪽에는 모든 전쟁 수단의 행사가 정당화된다. 국가끼리 전쟁이라면 ‘적’더 대등하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와 가능하지 않은 행위가 있지만, 상대가 이의의 여지가 없는 말소해야 할 존재라는 게 되면, 국가의 무력행사를 제한하는 모든 제약은 해제된다.


통상의 전쟁에서는 그 목적은 국가의 승리이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적’의 섬멸이 목적이 된다. 그래서 적기 격추도 적 부대나 요충지 제압도 아닌, 오로지 ‘몇 명을 살해했는지’가 전과戰果가 된다. 실제로, 어느 시기부터 모든 작전 성과는 ‘테러리스트 몇 명 살해’라는 형태로 발표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어느새, 전쟁 목적이 ‘인간 살해’인 점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이 경우 ‘적’은 ‘인간’이라고 인정되지 않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언명이 드러내듯이, 그들은 ‘가치를 공유하는 인류’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살해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닌 무엇이다, ‘문명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류’에는 속하지 않는다. 그것이 ‘테러리스트’다, 라고 하는 이유이다. 결국,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인류에 속하지 않는 인간’, 이 표현이 언어 모순이라면 demihumanA human-like race내지는 ‘비인간’, 또는 미국적 상상력이 즐겨 묘사해 내는 ‘에일리언’ 류를 가리키는 게 된다. 말하자면 이 용어는 ‘전쟁’과 결합함으로써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 ‘말살해야 할 비인간’, 거꾸로 말하면 ‘죽여도 벌을 받지 않는 인간 아닌 인간’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든 게 된다. 


이제 와서는 자명한 말처럼 통용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는 이런 함의가 있으며, 강국(사실상은 미국)이 인류를 두 개로 나누어, ‘적’이라 지정한 자에게서 인류라는 자격을 빼앗고, 그들을 군사적으로 ‘문명’ 세계 질서에서 배제시켜 섬멸한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도 이 ‘전쟁’에서 표적만을 실수 없이 말소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국제적으로 합의가 있는 ‘형 집행’으로 용인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습 폭격과 소탕 작전은 그런 식으로는 실행할 수 없다. 더욱이 ‘문명국’은, 아군의 손상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효과 높은 방법을 선택한다. 표적을 확실히 말소하기 위해, 주변까지 충분히 파괴한다는 따위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테러리스트’를 죽이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말려들게 되며, ‘테러리스트’를 색출하기 위해 부근 주민 모두가 혐의를 받게 되며, 그렇게 하여 생겨나는 희생은 ‘부차적 피해’로서 방치된다. 당연히 반발과 저항이 생겨난다.


거기에 더해,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단계가 되면, 예전 식민지 지배국이 그러했듯이, 현지의 잠자고 있던 대립을 부추겨 상호 대립을 이용해 그곳을 통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항쟁이 심해지면 그들도 ‘테러리스트’로서 상대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테러리스트’는 항쟁을 통해 증식하고, 그 결과 ‘테러와의 전쟁’은 끝도 없이 확대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되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공백 지대가 확장되어 간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파괴하고 새로운 통치 기구를 만들었지만, 지금도 안정된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며, 그곳에서 불꽃이 튀게 되어,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이라크 혼란이 만들어 낸 공백 지대, 그곳과 시리아가 내전 상태가 됨으로써 생긴 틈새에 이슬람국가는 그때까지의 과격파 무장 조직과는 다른 존재로 ‘진화’해 출현했던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의 대칭성


‘테러와의 전쟁’은 끝이 없는 전쟁 상태를 잠재적으로 만들어 낸다. 적이 보이지 않는 이 ‘전쟁’ 상태에서는, 어느새 전쟁과 평화의 구별은 없어지고,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안전 보장’이라는 이름의 항시적인 예방 체제가 국가에 의해서 정당화되게 된다.


그러니까 ‘테러와의 전쟁’의 ‘패자’는, 공습 폭격과 소탕 작전의 ‘부차적 피해’로 목숨을 빼앗기거나, 또는 살 곳이나 생활을 파괴당해 난민이 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국가(정부나 권력자)가 수행하는 이 전쟁과 한 묶음으로 요구되는 ‘안전 보장’을 위해, 모든 자유의 권리를 국가에 내놓고 감시와 통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사국 시민이기도 하다.


‘문명국’으로 칭하는 쪽은, 한쪽에서는 ‘비인류’를 지명해서 그들을 지상에서 말소하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들은 IT 기술로 구석구석까지 감시되고 관리되는 ‘안전’이라는 감옥 속에서 안주하고, 전쟁터에서 사용되는 무기와 동일하게 모든 것을 자동화하는(자동차 운전까지) 첨단 기술에 몸을 맡기고, 어느새 ‘인간이 필요 없는 세계’로 향하면서, 그런데도 생명 과학으로 모든 질병으로부터의 해방과 수명 연장을 꿈꾼다는, 놀랄 만한 도착倒錯을 ‘진보’라고 믿고 있다.


전쟁 체제의 상시화만큼, 국가나 그것을 휘어잡으려고 하는 위정자에게 안성맞춤의 상황은 없다. 그리고 현재 일본의 아베 정권이 노리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다. 수상과 그 패거리가 내세우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것은, 흔히 ‘전쟁 전의 일본’으로 회귀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사실은 ‘전쟁 전’은 아니다.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은 ‘전쟁 중’이며, 전시 체제하의 일본이다. 관리와 통제가 국민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수용되고, 모두가 자진해서 국가에 봉사하고,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그런 국가이다(「자민당 헌법 초안」을 보도록 하자).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국민’으로 배척된다. 그것은 ‘메이지 이후’ 일본의 모습이 아니라, 중일 전쟁 이후 ‘전시 일본’의 모습이다.


실제로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따위라기보다도, 오히려 ‘이슬람국가’ 체제와 비슷하다. 이슬람국가에서 병사들은 ‘신’에게 몸을 바치고,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흔쾌하게’ 죽어 간다. 이슬람국가의 많은 병사들은 타국 출신으로, 그 지역 자체에 애착이 있을 리 없다. 그 점에서는 일본의 ‘전쟁 중’과는 다르겠지만, 지배 지역에서 징모徵募되어 전투원이 된 자는, 몸에 폭탄을 두르고 ‘몸을 바치는’ 일을 강요당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물론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그렇지만 전쟁인 한 ‘대칭성’을 벗어날 수 없고, 무제약적인 전투는 싸우는 쪽을 끝없이 ‘적’을 닮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 ‘전쟁’은, 전쟁 당사국이나 그 군대를 ‘테러리스트 집단’을 닮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테러’만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없다. ‘테러와의 전쟁’도 또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목 졸라 죽인다. 그 때문에 ‘안전 보장 체제’의 일상화는 사람들에게 ‘정상적 생활’을 이어갈 가능성을 단념하게 만든다. 아베 정권 주변은, 파리 사건이 일어나 ‘테러의 공포’가 강한 인상을 남긴 이 시기에 거듭해, ‘긴급 사태 조항’에서의 헌법 개정과 예방적 단죄를 가능하게 하는 공모죄共謀罪의 필요를 공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러리즘’이란 본디 이처럼 ‘공포(테러)’을 이용해 권력을 농단하는 짓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까? 그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순한 일이다. 절망과 잔인함과 그것에 의한 증오, 또는 치유하기 어려운 부정이 세계에 만연하지 않도록 한다. 예를 들면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해 있는 듯한 상황을 국제 사회가 좌시하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이슬람국가 같은 존재에 동조하여,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끌어넣어 자폭하는 그런 젊은이는 없어질 것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국가가 저마다 ‘살 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삶을 소망하고, 타자와 함께 사는 관용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너무 합리적이고, 너무 이상적이라고 한다면, 좀 더 현실적으로 가까운 방책은, 적어도 ‘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 듯한 정치 지도자를 갖지 않는 일이다. 그런 지도자는 거꾸로 ‘테러’를 불러오고,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포기하게 한다. 이 ‘전쟁’ 자체가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을 세계에 야기하고, 끝없이 ‘테러리스트’를 증식시켜 온 사실은, 부시 선언 이후 15년에 이른 ‘테러와의 전쟁’이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이다. <끝>



<출처 :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ji_kim&uid=75>




* 관련 포스팅 :  ☞  <칼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문명적 도착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