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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민 - 대통령의 ‘부정본능’

irene777 2016. 3. 22. 02:07



[서민의 어쩌면]


대통령의 ‘부정본능’


- 경향신문  2016년 3월 8일 -





▲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인간과 침팬지는 DNA 서열이 98% 이상 일치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반면, 침팬지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DNA대로라면 침팬지도 도구와 언어를 만들고, 나름의 문명도 이룩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바르키와 브라워가 쓴 <부정본능>이란 책은 그 해답을 제시한다. 인간이 성공한 이유는 제목 그대로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 때문이라는 것.


침팬지를 예로 들어보자. 무리들과 함께 어울려 놀던 ‘침팬지1’은 정신세계가 다른 침팬지들보다 약간 뛰어나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따르던 ‘침팬지2’가 늙어 죽는 것을 본다. 다른 침팬지들은 거기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던 반면 ‘침팬지1’은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럼 어떻게 될까? ‘침팬지1’은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두려움은 커져,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점점 더 아무것도 안 하려 했다.


다른 침팬지들이 보기에 ‘침팬지1’은 그냥 ‘또라이’다. 이런 침팬지와 결혼하려는 침팬지는 없었으며, 자연선택은 ‘침팬지1’을 도태시켰다. 하지만 인간은 이와 달랐다. ‘침팬지1’보다 정신세계가 훨씬 진화된 인간은 여기에 맞설 방어기제를 만들어 냈으니, 그게 바로 ‘현실부정’, 더 정확히 말하면 ‘필멸성의 부정’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잊은 채 살아가는 건 그 덕분이다. 동갑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그 날은 우울하겠지만, 현실로 돌아가는 데는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인간의 성공을 가져왔을까?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오래 존속하는 건물을 짓고, 빠르지만 사고 위험이 있는 교통수단을 타는 것 등은 현실부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7년 10월 공포된 10호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딱 한 번만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면 우울해질 수 있다. ‘5년이 지나면 영락없이 물러나야 하니, 대통령 자리도 무상하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목표한 바를 5년 동안 부지런히 하려고 애를 쓰는 게 정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힘썼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도이전으로 서울의 과밀화를 해소시키려 애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을 통해 자신의 지인들에게 화끈하게 일감을 몰아줬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무얼 하셨을까? 취임 첫해에는 대변인에 윤창중씨를 임명한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2년차에도 특별히 한 일이 없었다. 임기 중반이라고 할 3년차가 되자 대통령이 드디어 일을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역사교과서 국정화였다. 반대하는 여론이 더 높았지만 대통령은 흔들림 없이 밀어붙였고, 얼마 전 기사를 보니 친일과 독재가 미화된, 아이들의 혼을 맑게 해주는 교과서가 만들어진 모양이다. 지금은 노동개혁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를 압박하고 계신데, 이 법안만 통과된다면 우리 청년들이 비정규직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좋은 시대가 온다니 이것 역시 기대가 된다.





굵직한 일을 두 개나 하긴 했지만, 좀 이상하긴 하다. 5년이라는 기간이 막상 일하려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니, 하려던 바가 있다면 취임 초부터 화끈하게 밀어붙여야 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이렇게 띄엄띄엄 일할까? 2년차 때는 세월호 사고가 있었고, 3년차 때는 메르스가 있어서 일하는 데 지장이 있었긴 하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 두 가지 일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도 그다지 한 일이 없으니, 이걸 핑계 삼기엔 좀 궁색하다. <부정본능>을 읽고 난 뒤에야 이해가 됐다. 대통령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에 대한 방어기제로 ‘임기부정’을 구현하고 계신 거였다! 임기가 무한정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드니 일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고, 대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레임덕만 걱정하면 된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인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으면서 펄펄 뛰셨던 것도 그런 연유다. 남는 게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쓴소리를 해도 잘 듣지 않는다. 예컨대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대통령의 국가부채를 걱정한다. 노무현 정부 때 재정적자는 10조원에 불과했지만, 이명박 정부 때는 100조원의 적자를 봤고, 박근혜 정부는 불과 3년 만에 167조원의 신화를 이루었다는 것. 이런 말도 대통령에겐 별 소용이 없다. 임기부정의 달인답게 “그깟 부채, 천천히 갚지 뭐”라며 여유를 부리고 있을 테니까.


하기야, 임기부정을 대통령만 하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뜻있는 국민들은 이미 대통령의 임기를 19년쯤 되는 걸로 느끼고 있지 않던가?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하고 투표를 하자. ‘침팬지1’은 자연선택으로 도태됐지만, 대통령은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08203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