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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날의 진도, 거짓말인 줄 알아요”

irene777 2016. 4. 26. 04:40



“그날의 진도, 거짓말인 줄 알아요”


세월호 피해자 구술 증언 <다시 봄이 올 거예요> 두 번째

고 박성호 학생의 누나 박보나씨가 전하는 형제들의 목소리


- 한겨레21  2016년 4월 20일 -





그날 이후, 두 번째 봄이다. 지난 2년간 세월호 참사는 어떤 이들의 삶을 기막힘과 미안함으로 흔들었다.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펴냄)는 생존한 단원고 학생 11명과 어린 나이에 유가족이 된 15명이 보내온 2년의 시간을, 인권활동가와 르포작가 등으로 구성된 11명의 작가기록단이 구술로 채집해 엮어낸 담담한 기록이다. <한겨레21>은 앞으로 3차례에 걸쳐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 실린 구술 증언들을 발췌해 싣는다. - 편집자





▲ 4월5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단원고 박성호 학생의 누나 박보나씨가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그날 학교에서 수업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소식을 알려줬어요. 동생이 수학여행 가기 전에 핸드폰을 잃어버렸거든요. 사고 전날 수학여행 못 가게 됐다는 전화나 다시 가게 됐다는 전화나 다 제가 받았는데, 그때 와 있던 다른 친구 폰 번호로 전화 계속 걸어보고, 연락 기다리면서 안산으로 왔어요.


엄마·아빠는 진도 내려가고 있었고 예나는 단원고로 갔어요. 생존자 명단 확인하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었는데 네다섯 시쯤 엄마가 전화를 했어요. 진도체육관 명단에 성호가 없다는 거예요. 엄마는 계속 우시고. 저는 TV 계속 보면서 거기 상황 듣고, 막내 재우고, 예나한테는 자지 말라고 하면서 같이 기도하고. 씻을 때도 나 혼자 따뜻한 물로 씻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몸에 물이 닿는 것 자체가 슬프더라고요. 4월이라 좀 추울 때였잖아요. 성호는 이불도 못 덮고 있겠구나 생각하니까 미안해서 보일러를 못 켰어요.



이별도, 죽음도 모르는데


3일째 되는 날 이모가 걱정된다고 집으로 오셨어요. 5일쯤 지나서는 엄마·아빠도 챙겨야 할 것 같아서 진도에 내려가려고 준비했어요. 주말에 다 같이 내려갔어요. 체육관 입구 옆에 아버님들이 다 담배를 피우면서 엄청 많이 계셨어요.


들어가니까 완전 돼지우리 같고 사람 사는 데가 아닌 것 같고. 1층에 카메라가 쭉 있는데 제대로 안 내보내는 걸 이미 알았으니까, 가서 카메라 보이는 거 다 째려보고. 저는 아예 짐을 다 챙겨서 내려갔는데 부모님이 여기 사람 있을 데가 못 된다고, 다 올라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동생들도 챙겨야 하니까 그냥 올라왔어요. 그 뒤로 계속 소식 보고, 내려가 있던 친구한테 상황 듣고, SNS에 계속 올리고.


성호 장례 치르고 나서 엄마가 바로 입원했어요. 그 후에 아빠도 너무 힘들어서 입원했고. 저희는 아예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 막내만 낮에 학교를 갔어요. 다른 부모님들도 아이 올라오고 나면 대부분 입원하셨어요.


다들 몸이 안 좋은 상태라 입원한 건데 정신과 의사가 와서 진도 얘기를 해주면 거짓말인 줄 알아요. “설마요. 어떻게 국가가 그래요? 진짜요?” 시청에서 파견된 사회복지사들도 다 그런 반응이었어요. 병원에 있어도 몸 상태가 달라지지 않고, 진짜 부모님에게 맞는 처방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답답해서 퇴원했어요.


퇴원하시고 엄마는 바로 활동하러 나가셨어요. 엄마가 거의 분향소에 나가시니까 저는 엄마 챙기려고 나갔어요. 분향소 나와서 보면 부모님들이 더운 날에도 피케팅을 계속 하시고,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향소 나올 때는 더 잘해야겠다고 노력하게 되기도 했어요.


솔직히 부모님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간이었잖아요. 내가 왜 유가족이 돼야 하지? 저도 분향소에 가긴 하는데 유가족 대기실 문을 여는 거, 거기 앉아서 쉬는 거 다 싫었어요. 내 또래들이 분향하러 오는데 내가 대기실에 있는 것 자체가…. 돌아보면 형제자매는 약간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이별을 겪어보거나 죽음에 대해 알거나 이런 때가 아니다보니까. 받아들이는 데 부모님과 다른 부분에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시간 없이 그냥 엄마를 챙겨야 해서 나갔던 것 같고, 계속 그 공간에 있다보니 유가족이라는 게 주입된 것도 같아요.


제가 부모님들 ‘밴드’에도 들어가 있었거든요. 아빠 핸드폰이 안 돼서 가족대책위 밴드에 제가 들어가 있었거든요. 부모님들이 인터넷 기사를 챙겨보기 어려웠잖아요. 제가 기사들 옮기면서 상황 공유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비방글에 대응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비방여론에 상처받고 분노하고




▲ 지난 4월2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 천막에서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들이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에게 진상 규명을 호소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페이스북에서 ‘안산 쓰레기 동네에 어차피 쓰레기 될 애들’이라는 글을 봤어요. 처음 본, 희생자를 욕하는 글이었어요. 그게 페이스북에 떠도니까 비방글 고소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톡에 올렸어요. 반대표 아버님이 변호사분들과 고소를 하려 했고, 변호사님은 제가 처음 본 글이니까 저도 같이 하자고 하셔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가족대책위에서 아예 모니터링팀을 꾸려야겠다고 얘기가 나왔나봐요. 부모님들이 인터넷 활동을 많이 못하시니까 해줄 수 있냐고 저한테 연락이 와서 5월 말부터 하게 됐어요. ‘비방글이 없어지면 좋은 거니까 힘들지만 해볼까?’ 그때 가족대책위 일하던 분이 여기 일하다가 나중에 취직 안 될 수도 있다고 겁줘서 고민도 좀 됐지만, 그래도 애들 위한 일이니까 시작했어요. 제 동생만이 아니라 단원고 후배들이랑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들 일이기도 해서.


모니터링하면서 댓글을 다 봐야 하는데 그게 이삼백 개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감정적이 돼요. 많이 걸러내고 냉철하게 보려고 노력하지만 계속 보다보면 힘들어요. 이런 거 하기 싫다고 혼잣말도 했어요. 고소를 하는 것도 걱정이 됐어요. 나중에 보복하러 오는 거 아닌가 무섭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분향소 가서 애들 사진 보면, 얘네를 이렇게 욕하는데 가만히 놔둘 수 없겠구나, 내가 이 일을 안 할 수 없겠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고.


제가 모니터링한다는 게 알려지고 나서는 생존자 친구들이 제보도 하고, 단원고 1학년이나 3학년 애들한테서도 연락 오고 그랬어요. 특히 SNS에 보수 페이지가 갑자기 많이 생겼는데 애들은 SNS를 많이 하니까 애들이 더 상처받을까봐 걱정됐죠. 하면서 많이 단련되긴 했어요.


하는 얘기가 다 똑같고 같은 아이디로 똑같은 글 남기는 사람도 있고. 나쁜 비방글이 갑자기 생겨난 게 고위층 사람들이 ‘시체 장사 한다’를 얘기를 꺼냈을 무렵부터예요. 처음에는 이게 진짜 여론인가 싶어서 많이 좌절했는데 계속 보면 이게 한 개인의 생각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게 자꾸 느껴졌어요. 분노가 더 커졌어요. 내가 더 강해진 느낌? 그래도 온라인에서만 보던 걸 광화문에서 직접 볼 때는 충격이었죠.


이 일은 혼자 하고 있었어요. 가족대책위에서 사람을 더 구해주시지도 않았고. 제가 너무 힘들어서 다른 사람한테는 도움을 부탁하고 싶은데 차마 동생한테도 못 시키겠고 제 친구한테 시킬 수도 없고. 초반에 거의 집에서 하다가 사무실에 나가게 됐는데 옆에 다른 부모님들이 계시니까 그것도 되게 힘들었어요. 모니터링한 내용을 보실까봐.


페이스북에 어떤 사람이 비방글을 올려서 동생이 ‘나 유가족인데 그런 거 아니다’ 하면서 댓글이 오간 적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계속 말장난을 하니까 동생이 충격받고 힘들어했는데, 저는 너무 열받지 말라고 얘기하게 돼요. 걔네는 일부러 더 그렇게 하는 거니까 그냥 넘기라고, 잘 참으라고. 대응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진정시키기도 했는데…. 저도 답답했죠.



엄마·아빠 앞에서 울면 안 된다는 결심


엄마를 챙기려고 나갔던 건데 제 일이 생기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엄마가 여기저기 다니셔도 제가 같이 있을 수 없고 언제 쓰러질지 불안하고, 엄마랑 저랑 둘 다 활동을 하긴 하는데 둘 다 어디 있는지 모르고. 그래서 부모님들이 왜 엄마 안 챙기느냐고 묻기도 하시고. 일을 하면서는 저를 챙긴 것도 아니고 부모님을 챙긴 것도 아니고 동생들은 아예 챙기지도 않고….


엄마가 계속 나가 계시면 저라도 좀 집에 있어야 하는데 집에 와서 거의 잠만 자고 바로 나왔으니까. 힘든 걸 말씀드리진 못했어요.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니까 잘 모르겠는 것도 있고, 답답한데 의견을 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제가 얘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요. 부모님들이랑 일할 때 감정을 표현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엄마·아빠 앞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제가 울어야 할 때 안 운다고 답답해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해가 바뀌고 복학을 했어요. 복학한 뒤론 일을 안 했는데, 사실 일이 들어오기도 하고 그냥 시키는 일이나 부탁하시는 일을 하긴 했어요. 3월에는 적응하면서 조금씩 하다가 4월에는 너무 답답해서 그냥 학교만 다니진 못하겠더라고요. 학교 끝나고 기자회견 준비하고, 인터뷰 요청 들어오면 하고, 주말에는 도보행진 가고, 그러면서 수업을 제대로 못 듣게 되고 체력은 방전되고.


형제자매들이 1주기에 성명서를 낸 건 기적이었어요. 형제자매들 이름으로 입장을 밝힌 건 처음이었거든요. 유가족 중에서도 형제자매들은 유가족이라는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걸 부담스러워했어요. 형제자매들끼리 만나서 소개할 때도 누구 동생이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한 친구도 있었어요. 74명이나 서명 받아서 성명서 낼 때 저희는 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중학생 이상인 형제자매의 절반 이상에게서 받은 거거든요. 그 후로 희망이 조금 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답답한 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거. 우리도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가족대책위에는 형제자매들 연락처가 따로 정리돼 있는 것도 없어요. 유가족이 아닌 것도 아닌데, 제가 가족대책위에서 일할 때도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형제자매가 많이 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하시고. 공부 열심히 해서 인맥도 넓히고 그래야 앞으로 이런 일 안 당한단 얘기도 하세요.


그런데 우리가 괜히 분노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전에 참사나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서 그런 거잖아요. 갓 어른이 된 저한테도 화가 나는데,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잃고 분노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내 동생이 죽을 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는지.



가만히 있으란 말 하지 말아요


제 또래의 세월호 세대도 점점 잊어가는 것 같아요. 세월호 이전 경주 마우나리조트 참사가 대학생에게 일어났던 거라, 세월호 참사 다음은 중학생이냐 하는 얘기까지 나왔잖아요. 그런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저희에 대한 편견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인터넷 비방글을 보면서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는 청년도 많고. 세월호를 통해서 ‘나도 죽을 수 있구나’ 하는 걸 느끼고 점점 살기 힘들어져서 ‘헬조선’이란 단어까지 나오는데도…. 저희랑 같은 처지여도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예요.


세월호 세대의 배려가 필요한 것 같아요. 세월호 세대랑 저희는 계속 같이 살아가야 하잖아요. 제가 ‘유가족입니다’ 해도 유가족이 되기 싫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평생 유가족이잖아요. 배려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어른들이 하는 거랑 세월호 세대는 다르면 좋겠어요. ‘유가족이네’ 하는 눈초리는 안 받고 싶어요. ‘아직도 우냐’ ‘어떻게 웃냐’ 이런 감정의 억압도 당하고 싶지 않고. 끝까지 싸워주지는 못하더라도, 저한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 구술 : 박보나(세월호 희생 학생 박성호의 큰누나)

- 기록 : 미류 4·16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 발췌 : 한겨레21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출처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5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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