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가습기 살균제와 세월호
- 경향신문 2015년 5월 5일 -
▲ 문주영
경향신문 산업부 차장
15년 전인 2001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한 기업 홍보담당자가 찾아와 신제품 보도자료라며 샘플과 함께 건네줬다. 자료에는 가습기에 남아있는 세균을 없애주는 제품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바로 가습기 살균제였다. 당시 그 자료를 보며 “아무리 가습기에 있는 세균이 걱정되어도 그렇지, 날마다 청소하면 되는데 굳이 이런 안전성 확인도 안된 화학물질을 사용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거 안 팔릴 것 같은데…”라고 한마디 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과는 달랐던 듯하다. 가습기 살균제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언론에는 원인 모를 폐질환으로 임산부와 어린이들이 죽어간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사람 죽이는 가습기 살균제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끔찍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봐도 1500여명이 피해를 입었고, 이 중 200명 넘게 사망했다. 가장 피해가 많은 옥시 제품의 경우 177명의 피해자 중 무려 70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가습기 살균제에 들어있는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은 외국에서는 정화조 세정제나 살균제, 부패방지제 등으로 쓰이는 물질이라고 한다. 피부에 닿거나 섭취했을 때 유독성은 비교적 낮지만 호흡기로 들어오면 폐가 굳는 질환에 걸릴 수 있다.
그런데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면서 세월호 사건과 참 닮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세월호 사고를 둘러싼 원인은 ①무리한 화물 적재와 증축 ②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의 관제 허술 및 해경의 소극적인 구조로 인한 골든 타임 허비 ③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선원들 ④초동 대처를 잘못한 정부 등으로 요약된다.
이런 원인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옥시 등 제조 및 판매회사들은 제품의 빠른 출시를 위해 흡입 독성 실험을 생략했고(①), 이를 관리 감독할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를 의약외품이 아닌 공산품으로 분류해 안전성 여부를 미리 확인하지 않았으며, 이후 2000년대 중반 환자들이 원인 모를 질병으로 죽어갔음에도 역학 조사를 제때 하지 않아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시기를 놓쳤다(②). 2011년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지목된 후 옥시 등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오는 부작용 글들을 지우고, 서울대·호서대 등 특정 대학에 돈을 주고 유리한 실험보고서를 작성하는가 하면 법적 책임을 면하려고 했다(③). 그럼에도 정부는 지난 5년간 제대로 된 조사조차 하지 않다가 올해 1월에서야 전담 수사팀을 꾸리는 등 뒷북 대응을 하고 있다(④).
공교롭게도 검찰이 피해자 조사를 마치고 제조 판매 회사를 상대로 소환조사를 실시한 시기는 세월호 2주기가 막 지난 지난달 중순이었다. 그제서야 옥시를 비롯해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 및 판매회사들은 공식 사과를 하고 전담기구를 구성하겠다고 하는 등 대책을 내놓는 시늉을 했다. 정부 역시 항균·살균 기능이 있는 살생물제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해 안전성이 확인된 물질만 제품에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 보면 정부 실책과 부재는 더욱 또렷해진다. 미국 환경보호청은 가습기 살균제처럼 물에 희석하는 형태로 해당 화학물질 사용을 허가한 전례가 없고, 유럽화학국도 “들이마시면 치명적인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유럽에선 관련 제품을 출시할 때 화학물질 안전관리제도에 따라 제조사가 제품의 안전성을 사전에 증빙해야 한다. 국내 한 가전회사가 ‘은나노 세탁기’를 유럽 시장에 팔려고 했다가 유럽연합(EU)이 나서 살균된 물이 강으로 흘러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생태계에는 문제가 없는지 자료를 내놓으라고 해 시장 진출을 포기했을 정도다. 이쯤 돼야 제대로 된 정부라고 할진대, 시민들은 언제까지 정부 없는 서러움을 겪어야 하는지 가슴이 답답하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52049005>
'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 텔레그래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원정 시위 소식 상세 보도 (0) | 2016.05.10 |
---|---|
<칼럼> 하태훈 - ‘뒷북치다’ (0) | 2016.05.10 |
<다큐 영상> 중대 선거 : 정당체계 재편성 (0) | 2016.05.08 |
<칼럼> 인공지능시대 좋은 엄마는 어떤 엄마인가? (0) | 2016.05.07 |
[김어준의 파파이스#97] 노회찬, 송영길 그리고 연립정부2 (0) | 2016.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