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박원호 - 여론조사는 ‘공공재’이다

irene777 2016. 5. 12. 20:08



[정동칼럼]


여론조사는 ‘공공재’이다


- 경향신문  2016년 5월 11일 -





▲ 박원호

서울대 교수 (정치학)



여론조사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지난 총선 최대 패배자는 여당 뿐아니라 여당의 압승을 끊임없이 예측하고 퍼뜨렸던 여론조사들이었다. 한때 200석이 넘는 여당의 압승을 자신했던 예측의 근거는 편향된 조사였으며 여론조사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가 시민들의 눈밖에 난 것에는 부가적인 이유도 있다. 이런 미덥지 못한 여론조사를 우리의 정치와 행정과 언론이 남용했기 때문이다. 정당공천에서도, 정부부처의 각종 의사결정에도, 그리고 저녁 뉴스에서도 여론조사는 항상 있었고, 대통령 국정지지도의 미세한 부침에도 청와대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 모든 중요한 결정들의 근거가 되는 여론조사가 애초에 부정확하고 편향된 것이라면 맥이 빠진다. 그냥 “틀린” 조사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나쁜 것은 이런 조사들이 누군가의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한 간편한 구색맞추기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다면 여론조사는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딜레마는, ‘여론’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여론조사’라는 도구를 버리는 순간, 여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몇 년만에 돌아오는 선거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루소가 말한 것처럼 국민들이 선거기간에만 잠시 자유가 허락된 노예들이라면, 여론조사는 우리의 ‘자유’를 실낱같이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보루일지 모른다.


예를 들어,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국정지지율의 변화에 분통을 터뜨리고, 또 조그만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정치권의 나르시즘을 비웃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의 경우, 즉 어차피 여론조사는 엉터리이니 국정지지율을 무시하고 ‘국민을 섬기겠다는’ 입장보다는 앞서의 나르시즘을 언제든지 택할 것이다. 요컨대, 여론조사는 공공재이며 민주정치과정에서 나름의 중요한 위치와 역할이 있고, 그것이 정확하지 않고 오남용된다고 해서 버리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론조사를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인가? 이것은 여론조사 ‘업계’의 일일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매우 중요한 현안이기도 하다. 나의 진단 혹은 제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먼저 좋은 여론조사를 위해서는 비용이 들며, 비용을 절감하는 편법들과 조사회사들의 경쟁이 여론조사의 품질저하를 가져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왜 전화 자동응답시스템(ARS)을 이용한 조사가 몇백만원에 훨씬 쉽고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데 굳이 기천만원이 드는 조사원 방문조사를 하는가? 더 나아가 할당표집이 아니라 랜덤표집과 샘플비대체를 고수함으로써 조사비용이 수억원에 이르는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는 왜 필요한가? 그것은 자료의 품질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며 또 필요한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누구나 수억원짜리 명품조사를 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백만원 ARS조사를 근거로 파급효과가 수조원에 이르는 정부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우리 민주주의를 운영하는데 싸구려 문항과 20명 중 1명만이 겨우 응답한 값싼 샘플을 우리 사회가 더이상 참을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둘째, 여론조사회사들의 책임도 막중하다. 가장 주요하게는 지난 실패의 경험들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되짚어나가는 끈기가 필요하다. 특히, 결과를 공표하고 난 후 원자료를 공개함으로써 자료를 재검증받고 학술연구로 활용하는 ‘자료공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현재는, 결과가 공표되고 난 후, 그 원시자료는 누군가의 컴퓨터에 사장(死藏)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원시자료를 공개하는 구미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더나은 여론조사를 위해서나 공공성을 위해서나 수집된 자료의 공유와 검토는 필수적이다.


셋째, 이왕 공공재라고 불렀으니 정부의 적절한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는 선거와 관련된 여론조사들을 사전신고하고 그 결과를 등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표현의 자유와 무관하지 않은 여론조사과정을 통제하고 심의하는 것은 매우 미묘하고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값싸고 손쉬운 저품질의 여론조사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적절한 개입과 공개는 불가피할 것이다.


넷째,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다면 좋은 여론조사는 허상에 불과하다. 여론조사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저조한 참여와 신뢰하기 힘든 결과가 반복되는 무한한 악순환을 끊어야하는 이유는, 여론조사가 단순한 조사회사들의 영리활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선순환을 이루는 주요한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102059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