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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도재기 - 잡초, 한강과 조영남

irene777 2016. 5. 26. 17:17



[아침을 열며]


잡초, 한강과 조영남


- 경향신문  2016년 5월 22일 -





▲ 도재기

경향신문 문화부장



꽃마리, 쇠별꽃, 콩다닥냉이, 꿩의밥, 가락지나물, 봄맞이, 뽀리뱅이, 애기똥풀….


그냥 잡초가 아니었다. 잡초들도 저마다의 이름이 있었다. 독특하면서도 예쁜 이름들이다. 그저 뭉뚱그려 잡초라 부를 일이 아니었다. 이들도 지구 생물다양성의 어엿한 구성원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도 하고 있었다.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토양을 건강하게도 하며, 인간 먹거리나 약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생물이 살지 못할 것 같은 아스팔트, 콘크리트의 작은 틈에서도, 인간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다. 그러고는 수만년 전 선조들이 그러했듯 흙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묵묵하게 자신의 삶을 꾸렸다. 내가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을 뿐, 그 어떤 생명체보다 치열한 한 삶이었다.


국립수목원(경기 포천시)에서 ‘잡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랑은커녕 무관심의 대상, 아니 없애야 할 잡초가 주인공인 색다른 전시회다. ‘잡초를 보는 새로운 시각, 잡초에 반하다’란 주제 아래 40여종이 전시장을 채웠다. 저마다의 특성을 오롯이 담은 이름들도 당당하게 내걸었다. 관람객들은 잡초 대신 그 이름들을 부른다.


잡초는 원래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 모두의 생명, 먹거리였다. 6000~7000년 전 ‘신석기혁명’, 그중에서도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두 부류로 나눠졌다. 인류가 선택해 키워내는 ‘작물’, 그리고 작물 외의 것들인 ‘잡초’. 인구가 급증하면서 인간은 또 한번의 구조조정을 한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작물’, 작물 외의 것은 ‘잡초’가 됐다. 이 와중에 한해살이풀 ‘피’는 어엿한 ‘작물’에서 졸지에 ‘잡초’로 전락했다.


많은 식물 중 잡초와 아닌 것의 경계, 기준은 인간의 선택 여부다. 국립수목원은 잡초를 ‘(인간의) 관리대상 이외의 식물’로 구분한다. 모든 식물이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장미와 국화, 벼와 콩, 상추와 배추, 바질과 루콜라가 되었다.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그냥 잡초다. 인식론적 세계에서 호명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꽃도 ‘꽃’이라 불려야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것이 비로소 ‘꽃’이 된다. 호명되지 않는 것은 인식되지 않는다. 관리대상 외의 것이 된다. ‘국적’ ‘시민권’이란 이름의 관리대상에서 빠지면 누구든 제 이름을 잃고, 유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적, 시민권’의 또 다른 이름은 ‘배제, 차별’이다.


최근 소설가 한강이 큰 일을 해냈다. 그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한강에게는 ‘맨부커상 수상작가’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자마자 작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대형 인터넷서점에선 5년 동안 1109권 팔린 책이 단 하루에 1만권을 넘어섰다. 2007년 출간 이후 9년 동안 6만여부 팔린 책이 불과 며칠 사이 25만부의 주문이 쏟아졌다. 호명된다는 것, 생각보다 중요하다.


한강도 이를 잘 아는 듯하다. 두 달 전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을 때도, 수상소감에서도 그는 반복했다. “묵묵히 자신의 글을 쓰고 있는 동료 선후배 작가들을 지켜봐 주시면 정말 좋겠다”고. 자신만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가는 더 많은 이들의 작품도 읽어봐달라는 주문이다. 열심히 자신의 글을 쓰고 있는, 아직 호명되지 않은 소설가가 많다는 뜻이다.


어엿한 이름이 있으나 ‘무명 예술가’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시인과 소설가, 화가, 배우들. 한강은 이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그의 말은 그동안 ‘호명 사건’ 때마다 벌어진 쏠림과 이벤트 현상을 경계하는 시퍼렇게 날이 선 당부이자, 문학과 예술·예술가에 대한 아름다운 인식을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그림 대작사건 장본인인 조영남의 “미술계 관행” 같은 말은 더 한심하게 다가온다. 숱하게 호명돼 수많은 이름을 가진 그가, 제 이름 하나까지 숨겨야 하는 60대의 대작 작가를 이용해 얻으려 한 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가 인식하는 그림, 화가, 예술은 무엇일까.


‘질경이’ ‘쇠뜨기’ ‘개미자리’ ‘토끼풀’이란 이름표를 보면서 호명되지 않은 많은 예술가들이 떠올랐다. 작품 한번 읽혀지지 않은, 자신의 존재와 작품세계를 알릴 전시장에 한번 나서지 못한 그들이다. 부인 권포근과 함께 <잡초 레시피>를 펴낸 시인 고진하는 시 ‘잡초 비빔밥’에서 ‘흔한 것이 귀하다’고 통념을 뒤집는다. 그러고는 “흔치 않은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이/ 개망초 민들레 질경이 돌미나리 쇠비름/ 토끼풀 돌콩 왕고들빼기 우슬초 비름나물 등/ 그 흔한 맛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제 뭉뚱그려 잡초라 말하지 말자. 저마다의 귀한 이름을 찾아 불러줄 일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22056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