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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인하 - 괴물

irene777 2016. 5. 30. 16:04



[별별시선]


괴물


- 경향신문  2016년 5월 15일 -





▲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 만화평론가



한국을 찾은 외국 스타들의 인터뷰어로 활동한 한희준과 에릭남이 게스트로 나온 TV 토크쇼를 봤다. 에릭남은 15개월 만에 새 앨범이 나와 리포터를 그만두었다고 말했고, 한희준은 인터뷰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해 3개월 만에 하차하게 됐다고 했다. 이후 서로의 인터뷰를 과장되게 재현하고 마무리됐다.


어쨌건 결론은 에릭남. 인터뷰를 몇 개 찾아봤다. 에릭남은 인터뷰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유도해 냈다. 에릭남의 인터뷰에는 “김치 좋아하세요?” 따위의 질문이 없었다. 보는 이가 부끄러워질 바로 그 질문이 안 나오는 인터뷰가 모두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단체 사진 찍을 때 ‘파이팅’ 구호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말처럼 비정상의 정상화가 중요하다.


“김치 좋아하세요? 싸이 아세요? 말춤 춰 볼까요?” 우린 이런 상투적이고, 일방적이며 무례한 질문들과 함께 살아간다. 질문을 바꿔볼까? “애교 부탁해요. 섹시 댄스 보여주세요.” 앞 질문은 국가주의의 극단이고, 뒤의 질문은 남성중심주의 극단이다.


완전히 다른 질문처럼 들리지만 두 질문 모두 내가 속해 있지 않은 타자들을 만나 발화한다. 놀랍게도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 상대방은 어쨌든 한국을 사랑해야 하는 외국인과 가끔은 섹시하기도 한 국민여동생으로 일반화돼 소비된다. 다른 것 같지만 국가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한 몸에서 나온 두 머리를 한 괴물이다. 약해 보이면 물어뜯는다.


걸그룹 멤버인 설현과 지민이 이 괴물에게 물렸다. 생방송에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누군지 몰랐다. 잘 걸렸다. 모두 달려서 물어뜯자. 아이돌의 역사의식 부재를 지탄했고,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도 채우라는 훈수도 나왔다. 외적인 것, 그러니까 몸매를 만들고, 칼 군무를 연습하는 일 따위를 말하는 것 같다.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 노력과 고단한 삶은 리얼리티 쇼프로그램에서 훔쳐볼 수 있었다. 무려 국민 프로듀서들에게 선보일 노래를 연습하기 위해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소녀’들이 매번 밤을 새우는 걸 볼 수 있었다. 몇몇은 탈진해서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기계처럼 맞아 돌아가는 칼 군무는 가학적인 수준의 연습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성 연예인들에게 강요되는 비현실적인 몸매 역시 고통을 통해 깎인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외적인 것들을 채우는 노력만큼 내적인 것들도 채우라는 말이다.


내적인 것을 채우라고 요구하기 전에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여주고 누구인지 맞히라고 요구하는 질문이 정당한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한두개의 질문으로 상대방의 사상을 검증할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외적인 것이건, 내적인 것이건 뭔가를 빼거나 채우거나 우리가 참견할 문제도 아니다. 그녀들을 개인으로 존중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유독 만만한 이들에게만 가혹하다.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갖추어야 할 사람들이 어디 설현과 지민뿐일까.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두 여자 아이돌은 국가주의의 이빨 앞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급기야 무대 위로 올라 사과를 한다. “무지야말로 가장 큰 잘못임을 배웠다”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고, 또 불편을 느꼈을 분들에게 마음속 깊이 죄송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건 독립운동가 사진을 구분하지 못한 아이돌이 해야 할 사과가 아니라 세상을 엉망으로 만든 누군가들이 해야 할 사과다.


우리 주변을 배회하는 두 머리의 괴물은 언제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있다. 나와 다른 걸 인정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주체적 개인이 아닌 무언가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때 두 머리의 괴물이 너와 나를, 우리 공동체를 집어삼킨다. “김치 좋아하세요? 싸이 아세요? 말춤 춰 볼까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다면, 다른 일에도 괴물이 되지 말기를 노력하자.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152055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