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정지은 - 추모의 방식

irene777 2016. 5. 30. 16:18



[별별시선]


추모의 방식


- 경향신문  2016년 5월 22일 -





▲ 정지은

 문화평론가



쉬이 눈과 귀가 피로해지는 요즘이다. 밖에 나갈 때 이어폰을 챙기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됐다. 특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멀리 가야 할 때, 이어폰은 필수품이다. 눈을 가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귀는 막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전철 스크린도어에는 무슨 기준으로 골랐는지 알 수 없는 시가 쓰여 있고, 손잡이부터 의자까지 눈 닿는 곳마다 형형색색 요란한 광고판으로 가득하니 어디 한 곳 편하게 눈 둘 곳이 없다.


물론 이어폰을 끼고 있다고 해서 머리 위로 광고 전단지를 쓱 붙이고 사라지는 사람, 사연을 담은 쪽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 사람,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사람들까지 피해가긴 어렵지만 고육지책이다. 지하철에서 내렸다고 끝난 게 아니다. 출구까지 가는 길도 지난하다. “선진국도 우측통행을 한다”, “에스컬레이터는 한 줄로 타라”, “운동할 시간 없으시죠?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대한민국 모든 곳이 운동이 됩니다”. 안내인지 계도인지 알 수 없는 문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하다못해 계단도 말을 한다. “당신을 위한 건강 디딤돌, 저는 계단입니다”, “헌혈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도심을 벗어나면 괜찮을까? 집 앞 공원도, 울창한 산속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손바닥만 한 공원일지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훈수를 피해갈 수는 없다. ‘돗자리를 펴지 마라’부터 시작해 ‘금지’된 것들은 차고 넘친다.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 텐트 설치 금지, 낚시 금지, 야영 및 취사행위 금지…. 금지의 이유가 되는 관련 법률과 어겼을 때의 벌금, 관리 주체까지 빨갛고 커다란 글자로 적힌 현수막들이 곳곳에서 나부낀다.


얼마 전에 다녀온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기억이 떠오른다. 국립공원 내에 수많은 나무가 있었지만, 어느 나무에서도 인위적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네 뒷산 나무에도 형형색색 산악회들의 리본이 달려 있는 것에 익숙했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5시간 가까이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산불 조심’, ‘흡연 금지’ 등과 같은 현수막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일부러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넓은 공원을 어디에서 관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트레킹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탄 보트도 마찬가지였다. 환경 보존을 위해 전기로 움직인다는 보트는 단순함 그 자체로, 어디까지 간다는 안내 문구판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출발 안내는 없었지만, 보트는 정확하게 안내판에 적힌 시간에 맞춰 사람들을 태웠고, 시간이 되자 출발했다. 햇빛은 따뜻했고, 호수는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들 역시 고요히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인형을 안고 타이타닉을 한 장면을 연출하며 키득거리던 아이들도 사진을 찍고 나자 조용해졌다.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 새 소리, 물결도 일렁이지 않는 호수를 가르는 보트 소리뿐이었다. 호수는 호수 가득 산과 구름과 하늘을 담고 있었고, 보트는 조용히 그 호수의 풍경 속을 흘러갔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고요는 계속되었다.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깨끗했다. 어떠한 안내도, 홍보성 멘트도 필요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평화로웠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젊은 여성이 살해당했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 혐오 범죄에 희생된 한 젊은 여성을 애도하는 공간이 됐다. 그런데 이 작은 추모의 공간이 불편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바로 그런 불편함의 정서가 정당하고 당연한 추모와 애도에는 ‘유난스럽다’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게 하고, “여성이 무시했다”는 가해자의 말 안 되는 이야기는 분석을 거듭해 이유를 찾게 만드는 원동력일 터다. 어떻게 보면 강남역 10번 출구야말로 거리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계도성 현수막이 정말 필요한 곳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에서 버젓이 폭력을 자행하는 세력들을 방조하는 지금의 상황이 참담한 이유다. 광고가 듣기 싫으면 이어폰이라도 낄 수 있지만, 이 악다구니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걸까.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22053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