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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영택 -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 전문성에 대한 무시

irene777 2016. 6. 14. 13:45



[문화와 삶]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 전문성에 대한 무시


- 경향신문  2015년 6월 9일 -





▲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1950년대 후반에 앤디 워홀은 즐겨 다니던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화랑에서 재스퍼 존스와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를 접했다. 당시 존스는 성조기를,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캔버스 표면에 그대로 옮겨 그렸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2차원의 표면에 눈속임을 부여해 3차원의 환영을 만들고자 했던 르네상스 회화의 전통을 거부하고 캔버스의 평면성을 유지하면서도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이미지를 올려놓았다. 그림이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표명했던 것이다.


이에 영감을 얻은 워홀 역시 본래 평면인 기존 이미지를 캔버스 표면에 평면적으로(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밀착시켰다. 이처럼 워홀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 했고, 의도적으로 비개성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며 대중적인 이미지를 약간 변형함으로써 인생과 예술의 폭을 좁히려 했다.


이처럼 팝아트는 그 이전의 추상회화가 지나치게 작가의 개성, 독창성과 창조성을 강조하고 회화의 평면성에 집착하면서 이미지를 배제한 데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작업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워홀은 의도적으로 기존의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조수를 시켜 판화를 찍고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factory)’라 칭했다.


팝아트의 여러 전략은 그런 의도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된 것이다. 사실 현대미술은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 이후로 작가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관례에서 벗어났으며 차용과 선택이 보편화되었고 따라서 작가의 손작업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도 사실이다. 그런 것들을 흔히 개념적인 작업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런 것과는 달리 여전히 작가만의 손의 감각을 중시하는 작업도 분명 존재한다.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회화의 상당수가 그런 예다. 조수를 이용하고 공장시스템에서 주문 제작되는 방식의 작업과 손을 이용한 작업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우선적으로 표명되어야 하고 그 이유가 합당하게 개진되어야 하며 그것이 미술계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가수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하고 이를 자신의 작업으로 위장해 시장에 판매한 것에 대해 사기혐의를 받고 있다.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대신 그리게 한 것이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념적인 성향의 작업들이 조수를 시켜 제작하는 것이 관행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조수를 써야 하는 개념적인 작업도 아니고 그동안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말해왔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생각이다.


분명 동시대 미술을 구성하는 것의 하나가 작품 창작의 물리적인 노동은 전문 인력이 대체하고 작품의 브랜드를 작가 이름으로 사용하는 현상이며, 수많은 작가들이 조수를 동원해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주문-제작 관행’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주문-제작으로 얻은 작업을 기획하고, 감상하고, 호평해 온 갤러리와 관객과 평론이 부지불식간에 연루된 결과물이 그간 미술계의 관행임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반이정은 이번 사건을 “동시대 미술의 풍경 속에 굳게 자리한 비밀스러운 작동 원리가 본의 아니게 미술계 바깥으로 노출된 지극히 희귀한 사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그러한 지점이 현대미술에서 비록 보편적인 추이라 하더라도 이는 작업의 개념과 성격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조영남의 작가로서의 양심,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 현대미술과 작가에 대한 매우 위험한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전시할 수 있으며 판매할 수 있다. 문제는 전문성 및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전문성의 판단과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미술시장에서는 오직 작가의 지명도, 명성만이 지배한다.


그래서 연예인들의 작품은 비교적 손쉽게 판매된다. 조영남의 경우도 그것을 이용한 사례다. 작품 자체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평가에 의해 작품판매가 되지도 않는 것이 우리 미술판의 허접함이다.


따라서 조영남과 같은 이가 화가로 행세하고 미술 전문프로그램의 패널을 맡고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쓰는가 하면 전시를 하고 그 작품이 다수 판매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는 우선 화랑이 문제다. 그저 연예인의 명망성에 기대어 작품을 판매해 보려는 얄팍한 의도밖에 없기에 말이다. 전문성에 대한 평가와 작품을 보는 눈이 없기는 구매자들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작품을 구매하려면 진정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거나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고 논의되는 작품을 구입해야 하는 게 지극히 정상 아닌가?


물론 조영남을 진정으로 실력 있는 화가로, 그의 화투그림이 매우 뛰어난 그림이라고 믿고 있다면 할 말은 없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92129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