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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성주 - 협치의 미학, 갈등의 정치학

irene777 2016. 6. 29. 17:27



[시대의 창]


협치의 미학, 갈등의 정치학


- 경향신문  2016년 6월 21일 -





▲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



지난 4·13 총선 이후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를 꼽으라면 아마도 ‘협치’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총선 결과가 나오자마자 협치를 강조했고 그제 여당의 원내대표도 국회에서 협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만약 청와대와 새누리당만이 총선 이후 ‘협치’를 일방적으로 강조했다면 이는 의회의 다수를 점하게 된 야당을 대상으로 국정운영에 발목잡기 하지 말라는 경고나 사전포석으로 해석하고 고깝게 볼 만도 하다.


그러나 ‘협치’라는 용어는 야당들에서도 중요한 정치용어로 등장하고 있다. 야당들도 앞다투어 우리 정치에는 ‘협치’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나서고 있다. 이쯤 되면 지난 몇 년간 한국정치의 가장 큰 화두처럼 보였던 ‘새정치’라는 말을 이제 ‘협치’라는 용어가 대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정치’라는 단어가 그 안에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담아내는 구체성 확보에는 실패한 채 보수편향적인 정당체제로 귀결된 것처럼 ‘협치’라는 용어 역시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성과는 관련 없이 한때의 유행처럼 사용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은 최근 진영간 증오의 동원을 통한 정치적 양극화가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백번 곱씹어봐도 맞는 지적이다. 한국정치는 최근에 여야 할 것 없이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비난을 통해 자기 진영의 강한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것을 반복해 왔다. 이는 한쪽 극단의 입장에만 서기 힘든 평범한 다수 시민들의 목소리를 삭제한 채 목적을 잃어버린 정치적 공방만 남기는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증오만을 동원하는 정치는 정치계와 시민들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아름다운 말의 성찬 속에서 평화롭고 따뜻한 풍경만을 연출하는 것이 본질은 아닐 것이다. 정치의 풍경이 날선 비난의 진흙탕보다 품격 있는 대화와 논쟁의 장인 것이 낫다고는 하지만 그 모두가 답답한 현실의 개선 방향과 관련 없는 미학적 연출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진흙탕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현실의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것을 정치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정치가 ‘협치’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없는지 그리고 ‘협치’를 해야 한다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협치’라는 말에는 마치 현실에서의 수많은 ‘갈등’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사연이 부차적인 것처럼 치부하고 기계적으로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갈등해결책인 것처럼 말하는 듯하다. 물론 타협은 정치의 속성이자 현실세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갈등해결 방법이다. 그러나 타협과 협치 이전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하고 다투는 ‘갈등’이 없다면, 대부분의 타협은 현실세계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굴종의 요구를 미화시키는 ‘액세서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대표해야 하는 민주주의 정치는 ‘협치’의 방법론에 집중하기 이전에 갈등을 조직하고 드러내는 정치의 ‘목적’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이즈음 오히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출입구에 메모지를 붙이며 비정규직 청년노동자의 비극과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정치는 이를 더 큰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갈등으로 조직하기보다는 ‘협치’의 자세를 말하며 애써 이 갈등들을 안타까운 하나의 사건 정도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존의 위협에 놓여있는 최저임금의 인상을 요구하는 절박한 청년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는 ‘중향평준화’의 ‘협치’는 혹여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요구하는 복종의 부드러운 명령이지는 않은가?


만약 ‘협치’라는 용어가 이런 방식으로만 사용된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지하철 출입구와 스크린도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제도와 시스템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채 기존의 폭력을 반복할 뿐이다. ‘협치’라는 용어가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강자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복종이거나 정치세력들 간의 야합이 아니라 절박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겪고 있는 갈등해결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할 때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정치는 평화로운 ‘협치’를 도모할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어떻게 더 치열하게 대변하고 대표할 것인지를 두고 더 크게 ‘갈등’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절실한 단어는 강자의 ‘미학’으로서의 ‘협치’가 아니라 약자의 ‘정치학’으로서의 ‘갈등’이라는 단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1205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