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5와 38…사고와 자살의 나라
- 경향신문 2016년 6월 30일 -
▲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 5, 13, 38. 로또 당첨번호도 아니고 웬 뜬금없는 숫자냐고, 규칙성도 없이 나열된 숫자에 의아해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각 살인 범죄로, 산재사고로, 교통사고로 아까운 목숨이 덧없이 사그라져 가고 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살인 범죄로 1명, 산재사고로 5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음주운전이나 부주의한 운전으로 하루에 13명이나 죽는다. 교통사고 피해자에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도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시험과 공부, 경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젊은 청춘, 구조조정이나 실직으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 사업실패로 삶에 지친 가장과 고독함과 질병에 시달리던 노인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숫자가 하루에 38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타인에 의한 것이든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이든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가 일상이 되었다. 묻지마 칼부림이나 혐오범죄로, 구의역 일터에서, 도로 위에서 그리고 아파트 옥상이나 번개탄을 피운 차 안에서 귀하디귀한 생명이 우리와 이별하는 그 시각, 병원의 응급실이나 중환자실, 그리고 구조의 현장에서는 1명이라도 더 살려내려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살인 범죄의 피해자가 되거나 교통사고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운명일 수 있지만 개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그들의 팔자소관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목숨이다. 다 중하디중한 목숨이지만 우리나라를 ‘사고공화국’,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붙여준 5와 38에 관심을 쏟아 보자. 이 숫자는 개인보다 국가의 책임이 너무 커 국가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존중의무를 갖는다. 생명보호의 소극적 의무가 아니라 생명권 보장의 적극적 의무를 진다. 국민의 생명은 평등하며 누구도 차별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문화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사회·환경적 요소들을 제거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를 말한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와 모든 자유와 권리는 생명을 전제로 한다.
생명권은 모든 기본권의 토대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의 인간적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 기초 생활 및 삶의 질을 위협받는 취약 계층을 보살피며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산업사회로의 성장으로 발생할 위험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예방과 안전을 위한 규제와 법제도의 그물망을 갖추어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할 위험을 예방하고 안전을 강구하는 법과 제도를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서는 안된다. 산재사고나 교통사고와 같은 후진국형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국가와 정치는 국민의 생명을 최우선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가. 하루에도 수십명이 죽으니 국민의 생명에 무감각한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 주위에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노인들을 포함해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숱한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무한경쟁의 사회는 경제·사회적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을 패배자로 낙인찍는다. 삶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야 할 청춘은 아프기만 하다. 질병과 고독 속에 자살하는 노인은 늘어만 가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은 청년들은 아프다 못해 스스로 삶을 정리하는 극단적 선택을 취하기도 한다. 노동의 기회를 상실하고 노동의 권리를 침해받은 이들도 생존의 벼랑 끝에서 추락하고 있다. 사는 것이 더 힘든 ‘헬조선’을 탈출하려고 마음먹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자살을 ‘사회적 죽음’, ‘사회적 타살’로 규정하는 것이다.
빈부격차와 양극화, 불평등을 낳는 성장위주의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사회적 죽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살인 가습기 살균제나 과적 세월호의 침몰에서 보듯이 성장과 이윤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는 생명경시가 일상화되고 사고공화국의 오명은 여전할 것이다. 그 오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국가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더디 성장하더라도 사회적 배제와 차별 해소와 함께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와 지원 강화 등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미래의 적신호를 제거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생명권과 우리 후손의 미래가 최고의 가치가 돼야 한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3021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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