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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한용 - 경제민주화 포기, 그 참혹한 대가

irene777 2016. 7. 9. 23:11



<성한용 칼럼>


경제민주화 포기, 그 참혹한 대가


- 한겨레신문  2016년 7월 7일 -





▲ 성한용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상법 개정안은 그 순간 없던 일이 됐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항복한 것이다. 

이대로 가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보다 훨씬 더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대한민국을 ‘잃어버린 20년’으로 밀어 넣은 주범이 누구라고 기록할까.



실질성장률이 1980년대 후반 4% 수준에서 1990년대에는 1%로 떨어졌고 2000년대에는 0%대로 밀렸다. 엔고가 겹치고 물가 하락세가 지속되면서 명목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잃어버린 20년’의 고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 시작된 일본의 장기불황 얘기다.


우리나라 경제는 일본과 무척 닮았다. 인구 고령화를 앞두고 일시적으로 1인당 소득이 높아지고 경상수지도 흑자를 보이기 쉬운 구조까지 똑같다. 1985년 이후 우리나라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추이는 20년 시차로 일본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이대로 가면 2020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한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엘지경제연구원 이지평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의 경험에서 몇 가지 교훈을 끌어냈다. 예를 들어 “경기회복을 기다리고 참고 견디는 구조조정은 한계가 있으니 트렌드의 변화에 선행적으로 대응하면서 짧은 기간 내에 신속하게 구조조정을 집중하여 마무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했다.


총선 직후인 4월20일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대표가 일본의 전례를 들어 박근혜 정부에 ‘본질적인 구조조정’을 촉구했다. “10년 가까이 매년 1000억달러 이상 예산을 투입하며 경기회복을 기대했지만 ‘잃어버린 10년’, 그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지나온 일본을 따라가선 안 된다”고 했다.


김종인 대표는 6월21일 국회 연설에서 일본형 장기불황을 비켜가기 위한 처방을 제시했다. 경제민주화였다.


“거대 경제세력의 로비는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독과점을 형성해 건전한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교란한다. 거대 경제세력의 특권적, 탈법적 행태를 방치하면 정상적인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그는 7월4일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을 내용으로 담은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의 내용은 대부분 박근혜 대통령의 2012년 대선 공약이었다. 2012년 박근혜 후보의 대선 공약집 경제민주화 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부문 간 격차가 확대되고, 성장잠재력을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경제민주화를 통해 모든 경제주체들이 성장의 결실을 골고루 나누면서, 조화롭게 함께 커가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감동적이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 법무부는 2013년 7월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실제로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8월28일 청와대에서 10대 그룹 총수들과 오찬 간담회를 했다. 옆자리에 이건희, 정몽구 등 막강한 경제권력을 쥔 총수들이 앉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는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하지 않고 본래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되는 상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도 잘 알고 있다. 그 문제는 정부가 신중히 검토해서 많은 의견을 청취하여 추진할 것이다”라고 했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상법 개정안은 그 순간 없던 일이 됐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항복한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하지 말아야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대기업 총수들의 거짓말에 속은 것인지, 아니면 겁을 먹고 물러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굴복해 국민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결성된 박근혜-김종인의 경제민주화 연대는 경제권력을 다시 정치권력의 통제권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으로 연대는 무너졌고 경제민주화는 실종됐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보다 강하면 구조조정은 불가능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구조조정을 할 수 있을까? 절박감도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 경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대로 가면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천천히 죽어갈 수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보다 훨씬 더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대한민국을 ‘잃어버린 20년’으로 밀어 넣은 주범이 누구라고 기록할까.



한겨레신문  성한용 선임기자 -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13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