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살판나는 개헌을 위하여
- 한겨레신문 2016년 7월 19일 -
▲ 박구용
전남대 교수, 시민자유대학 이사장
헌법(憲法)이 낡았다. 국민을 통합할 힘을 잃었다. 정의를 보장하지 못하니 매사에 생사를 건 싸움이다. 이긴 놈은 살맛, 진 놈은 죽을 맛이다. 죽도록 싸울 수밖에 없다. 싸움판을 뒤집을 살판나는 개헌이 필요하다. 낡은 집 부수고 새집 짓자는 말이 아니다. 고치고 다듬어 함께 살 만한 집으로 바꾸자는 뜻이다.
법치는 두 가지다. ‘법을 이용한 통치’와 ‘법에 의한 협치’가 있다. 전자의 법은 권력자의 반민주적 지배 수단인 반면, 후자의 법은 민주적 권력과 권리의 체계다. 87년 탄생한 현행 헌법은 이 나라에선 처음으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시켰다. 그토록 자랑스러운 헌법이 어느덧 정의와 멀어진 헌-법이 되었다.
통합의 원천으로서 이 나라 헌법이 천명한 정의의 원칙은 균등(공정)이다. 헌법 전문에 두 차례 균등이 나온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가 첫번째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가 두번째다. ‘기회균등’과 ‘생활 균등’을 정의의 두 원칙으로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헌법 곳곳에 균등이 아니라 차등이 독점과 독식을 용인·조장하고 있다.
차등이 나쁜 것은 아니다.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말처럼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가는 차등은 정의에 가깝다. 하지만 많이 받은 자들이 더 많이 가져가는 독점과 독식은 나라를 망치는 독약이다. 87년 헌법 속에는 크게 ①승자독식, ②중앙독점, ③국민독판이라는 세 가지 독소가 숨어 있다. 분산, 분점, 분권하는 개헌을 할 때다.
①승자독식을 차단할 권력분산에 대한 논의는 권력구조 개편에 집중된다.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를 넘어 ‘어떤…’으로 구체적 담론을 펼칠 때다. 제왕적 대통령 못지않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국회도 견제해야 한다. 적대적 지역패권을 기반으로 공존하는 정당과 의회의 구조로는 정권교체나 권력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한동안 혼자 다 먹는 대통령제만큼 자기들끼리 계속 나눠 먹는 의원내각제도 위험하다. 가능하면 많이 나누고, 필요하면 언제나 바꿀 수 있는 권력만이 건강하다. 다수만이 아니라 소수 시민의 의견과 의지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권력구조를 만들려면 선거제도 개편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②중앙권력의 독점을 권력기관과 수도 이전으로 완화시키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소될 중앙패권이 아니다. 지방분권형 개헌이 절실한 까닭이다. 5·16 쿠데타 세력이 헌법에서 삭제했지만 87년 부활한 지방자치(헌법 제8장)의 뼈대를 먼저 지역자치의 프레임으로 바꿔야 한다. 지방이란 말 속에는 중앙 서울의 독점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서울도 부산이나 광주처럼 지역이다. 중앙정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지역정부가 도맡아야 한다. 교육·문화, 보건·복지, 생활·환경 등의 분야에서 지역자치정부가 자율적 정책결정권과 예산편성권한을 가져야 한다. 민생정치와 생활정치의 무대는 지역이고, 주인공은 시민이다. 자치가 가장 정의로운 사회통합의 길이다.
③기본권을 확장하는 개헌을 하자는 요구가 크다. 주권자인 국민의 당연한 요구다. 하지만 그전에 국민만이 기본권의 담지자로 명시된 헌법을 바꾸어야 한다. 인권의 헌법적 표현인 기본권은 국적과 상관없이 이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국민만이 아니라 세계시민 모두가 이 나라에서 존엄한 삶을 살아갈 권리, 곧 기본권을 갖는다고 표명할 때가 되었다. 69번 중에 최소 20번은 국민을 사람으로, 시민으로 바꾸어야 한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30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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