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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대엽 - ‘두 국민 정치’와 동맹외교

irene777 2016. 8. 27. 02:54



[정동칼럼]


‘두 국민 정치’와 동맹외교


- 경향신문  2016년 8월 11일 -





▲ 조대엽

고려대 교수 (사회학)



사드 배치와 관련한 논란이 정국을 달구고 있다. 유례없는 찜통더위만큼이나 뜨겁다. 세월호 정국이 길어지던 당시, 경향신문 칼럼에서 나는 정부가 주도하는 나쁜 정치를 ‘두 국민 정치’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정부나 집권 정치세력이 관련된 국가적 사태를 서둘러 봉합하거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국민을 두 편으로 가르고 서로에게 증오를 심는 질 나쁜 정치를 지적한 것이다.


두 국민 정치에는 공식 같은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 제1 원칙은 국민을 두 편으로 나눈 후 각각 선과 악의 프레임을 씌운다. 제2 원칙은 대응집회와 반대여론을 만들어 국민들 사이에 증오와 적대를 심는다. 제3 원칙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사태의 본말을 뒤집어 본질과는 동떨어진 적대 프레임을 확산시킨다. 사태의 대미는 분열과 갈등의 피로감을 조성한 후 ‘민생정치’로 국면을 탈출하는 것이다. 국론이 나뉠 때마다 반복된 이 같은 원칙들은 이제 아주 익숙한 현실이 됐다. 대통령이 약속한 ‘국민행복시대’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두 국민 정치로 갈라진 ‘국민분열시대’만이 남은 셈이다. 마침내 사드 사태에서 두 국민 정치는 도를 넘은 적대의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과정을 한번 보자. 두 국민 정치 제1 원칙, 사드 배치지인 성주 군민의 강력한 저항이 전개되자 정부는 성주 군민과 ‘외부세력’을 가르고 여기에 종북 대 안보의 프레임을 씌웠다. 최근 대통령은 “저를 선택해준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비난도 달게 받을 각오가 돼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지지층과 반대층을 다시 갈랐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국민들은 대통령의 국민이 아닌 셈이 됐다. 두 국민 정치 제2의 원칙, 경북 성주의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13개 보수단체가 사드 배치 찬성집회를 열었다. 성주 군민들의 ‘한국 사드 배치 반대’에 역행하는 이 같은 대응운동의 등장은 국민들간에 증오와 적대의 확산을 예고한다. 두 국민 정치 제3의 원칙, 더불어민주당 소속 초선 의원 6인의 방중외교 사건을 두고 정부와 보수언론은 사대주의, 매국외교 등과 같은 극단적 비난을 확산시켰다. 사드 문제를 애국 대 매국의 프레임으로 바꾸어 드디어 본말을 뒤집었다.


무엇보다도 사드 관련 두 국민 정치가 외교영역으로 확산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사드 문제의 본질을 보기보다는 한류규제를 비롯한 중국의 반응과 중국을 방문한 6인의 국회의원 행태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다. 온 나라가 두 국민 정치의 몹쓸 프레임에 갇힌 꼴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이 문제의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 사드 문제의 출발은 한국과 미국의 군사외교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국회의원 6인의 방중을 ‘매국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시급한 일은 사드 배치를 순식간에 결정해 버린 한·미 간의 ‘국민 없는 동맹외교’를 성찰하는 것일 수 있다. 사드 관련 두 국민 정치의 처음과 끝이 한·미 간의 동맹외교와 결부돼 있다.


오늘날 ‘동맹외교’는 탈냉전의 세계를 떠도는 ‘냉전의 유령’일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의 동맹은 더욱 그렇다. 여전히 동맹외교는 국익과 무관하거나 국익을 방해할 수도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로 지탱되고 있다. 그래서 동맹외교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끝없이 재생산한다. 또 동맹외교는 군사주의 동맹체계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대규모 군사훈련과 무기거래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동맹외교는 세계질서를 협력적 관계보다 대결적 관계로 몰아가기 쉽다.


게다가 동맹관계는 비대칭적 군사력에 기초하기 때문에 언제나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놓여있다. 세계질서는 냉전 이념에서 수많은 다양한 가치의 질서로 바뀌고 있다. 군사적 대결의 질서는 평화지향적 협력의 질서로 바뀌어야 한다. 비대칭적 군사력의 우위가 아니라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협력하는 질서가 추구돼야 한다. 반평화적이고 불균등하고 우열의 관계에 기반을 둔 동맹외교는 보다 자율적이고 공정하며, 서로가 책무를 공유하는 ‘협력외교’로 진화해야 한다.


협력외교는 정부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외교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점에서도 협력적이다. 꼼짝달싹할 수 없는 동맹의 틀 내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외교의 폭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각계각층이 다양하게 열어가는 협력외교만이 국가의 운명을 폭넓게 여는 출구를 만들 수 있다. 한·미 간의 냉전적 ‘유일 동맹외교’가 협력외교로 바뀔 때 국민을 둘로 나누는 정치의 비용은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중국을 방문한 초선 국회의원 6인이야말로 협력외교의 선구일 수 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1210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