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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민아 - ‘마이티 덕’ 오바마

irene777 2016. 8. 28. 21:26



[김민아 칼럼]


‘마이티 덕’ 오바마


- 경향신문  2016년 88일 -





▲ 김민아

경향신문 논설위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 쉰다섯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날 발표된 CNN·ORC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54%를 기록했다. 2013년 오바마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최고치다. 퇴임이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레임 덕(lame duck·뒤뚱거리는 오리·권력누수) 징후는 없다. 외려 마이티 덕(mighty duck·강한 오리)이라 불린다. 행복한 임기 말이다.


‘말년 병장’ 오바마의 이례적 인기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이란 핵협상 타결, 쿠바 국교정상화, 건강보험 개혁 등의 업적 때문이라고도 하고, 스캔들에 전혀 연루되지 않은 도덕성 때문이라고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요인은 품격이다. 버락·미셸 오바마 부부의 가장 큰 미덕은, 전 지구적 혐오대상으로 전락한 정치에 품위·품격·존엄 같은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데 있다고 본다.


오바마는 최근 여성지 ‘글래머’ 기고문에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그는 “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 남성들의 책무”라고 밝혔다. 딸은 얌전하게, 아들은 적극적으로 키우는 태도나 딸이 목소리를 높이고 아들이 눈물 보일 때 야단치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딸들이 모든 남성에게 그러기를(페미니스트이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그는 지난달 민주당 전당대회 찬조연설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저도, 빌 클린턴도, 그 누구도 힐러리 클린턴만큼 미국 대통령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며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에 힘을 실었다.


퍼스트레이디 미셸의 클린턴 지원연설은 정치언어의 전범과도 같았다. 막말로 악명 높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트럼프를 공격했다. “누군가 잔혹하거나 폭군처럼 군다고 당신이 그들 수준으로 전락해선 안된다. 우리의 모토는 그들이 저열하게 갈 때, 격조 있게 가는 거다.” 미셸은 최근 CBS 방송에 출연해 ‘내 딸들을 위한 노래’를 불렀는데, 디지털음원 판매량이 방송 직후 전주보다 1562% 치솟을 만큼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이 노래는 미셸이 주도하는 빈곤층 여학생 교육 지원 캠페인의 주제곡이다.


지난 4일 미국 일간 보스턴헤럴드는 ‘낸시스’라는 해산물 식당 로고가 찍힌 야구모자를 쓰고 계산대에서 일하는 흑인 소녀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다. 오바마 부부의 작은딸 사샤(15)였다. 여름방학을 맞은 사샤는 아버지의 단골 식당에서 빈 그릇을 치우고 서빙과 계산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바마 가족의 ‘미담’이 일회성이라면 정치적 쇼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일관되고 진지했다. 오바마는 2012년 재선을 앞두고 동성결혼 합법화 지지를 선언했으며 임기 중 연방대법원의 합헌 판결을 이끌어냈다. 미셸은 청소년 비만 퇴치나 대학 진학 장려 캠페인을 위해 텃밭을 일구고 래퍼로 변신했다. 부부는 딸들을 평범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해왔는데, 두 딸 말리아와 사샤는 백악관에 살면서도 침대 정리와 방 청소를 직접 했다고 한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를 지낸 캐서린 문 웰슬리대 교수는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흑인인 오바마는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부부가 소수자와 약자에게 관심을 쏟아온 배경에 ‘마이너리티 감수성’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오바마도 지난해 성소수자 잡지 ‘아웃’의 표지에 등장할 당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버락이라는) 우스운 이름을 가진 흑인 남자로 성장하며, 경계선 밖에 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생각하곤 했다.” 오바마 부부의 강점은 그러나 단순히 ‘정체성의 정치’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타고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주도면밀한 소통전략으로 중도층 상당수까지 설득해냈다. 54%의 지지율은 그 결과다.


오바마의 인간적 매력과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은 별개다. 북한도 이란처럼 제재를 강화하면 백기를 들 것이라 기대한 오바마 정부의 판단은 오류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보여준 희망의 단서만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이 지도자에게 기대하는 바는 대단한 게 아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실재한다 해도, 한국인의 삶의 질이 당장 유럽의 복지국가 수준이 될 수 없다는 정도는 모두 안다. 시민이 갈망하는 것은, 현재를 견뎌낼 만한 희망의 근거다. 시민은 정치가 권력투쟁 이상의 가치 있는 무엇이길 바란다. 지도자가 나의 오늘에 주목하고, 나의 내일을 좀 더 낫게 만들려 노력하길 바란다. 내가 내는 세금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공직자들이 최소한의 정직성을 지녔기를 소망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082044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