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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덕혜옹주에 관한 사실을 밝힌다

irene777 2016. 8. 31. 02:09



덕혜옹주에 관한 사실을 밝힌다

가당찮은 영화(?), 가당찮은 영화 비판(!)


진실의길  김갑수 칼럼


- 2016년 8월 22일 -




덕혜옹주를 다룬 영화가 나왔나 보다.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시비가 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 어떤 이는 영화가 그녀를 애국애족자로 미화했다면서, 덕혜옹주는 당시 철저히 무능했던 조선왕실의 피붙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영화가 일본제국주의의 횡포만 부각시켰을 뿐 그녀를 버린 조선왕실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덕혜옹주를 애국애족자로 표현했다면 영화도 뜬금없을 테지만, 이에 대한 비판들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로 보인다. 덕혜옹주는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자이다. 여기에다 조선왕실의 무능과 책임까지 거론한다면 우선 논점일탈인 데다 지나치게 자학적인 피해자 책임론이 될 수 있다. 마치 이것은 겁탈 당한 여성에게 ‘무력했다’고 힐난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침 어느 분이 태그를 걸어 ‘조선사 전문가인 김갑수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덕혜옹주에 관한 역사적 사실만 간단히 밝히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참고로 나는 조선사 전문가가 아니며 영화도 보지 않았다.


‘옹주’는 조선시대 왕과 궁녀 사이에서 낳은 딸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작호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1912년, 경술국치 경과 2년이었고 그때 아버지 고종의 나이는 환갑이었다. 하지만 옹주의 탄생과 조선 왕의 환갑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명치천황의 황후가 그 해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일제는 조선왕실의 자손이 하나 더 느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다섯 살에 주어지는 옹주 작호는 물론 왕의 정식 자녀로서의 입적도 허락하지 않았다.


연로한 아버지는 어린 딸을 가여워했다. 그래서 왕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즉조당에 유아원을 만들게 했다. 망국의 왕이라도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었나 보았다. 하지만 유아원의 교사를 한국인만으로 채용할 권한까지는 왕에게 없었다. 그래서 유아원의 교사로 일본인이 주로 채용되었다.




▲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유아원에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왕실 자제 10여 명이 다니게 되었다. 왕은 아침마다 즉조당에 들러서 어린 것의 재롱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왕은 어느 날 일본 총독을 덕수궁으로 초빙한다. 그러고는 총독을 왕궁 유아원으로 데려간다.


왕은 노래하고 유희하는 어린 것들의 앙증맞은 모습을 총독에게 보여 주었다. 갑자기 늙은 왕은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재롱을 떨었다. 그러더니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와 총독에게 인사시켰다. 총독은 어린 것을 안아 올렸다. 왕의 어린 딸은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총독은 본국 궁내성으로 전보를 쳐 덕혜옹주의 입적 문제를 서두르라고 한다. 다음 해 총독은 덕혜옹주를 일본인 자녀가 다니는 히노데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소학교를 마친 옹주는 일본에 있는 왕실 학습원으로 끌려가게 된다. 주변 눈치 보기에 익숙해진 소녀는 그 때 벌써 자신의 삶이 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놀음에 휘말리고 있음을 알았음일까? 소녀는 부모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틴다.


어린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빠 영친왕이 일본에 간 것은 일종의 인질이었고 그가 일본 여자와 결혼한 것도 강제라는 것을 어린 것은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왕 역시 딸을 떠나보내기가 싫었다. 하지만 아비가 한 일은 다소 옹졸했다. 왕은 시종 김황진에게 아들이 있는가를 물었다.


시종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왕은 시종의 사내 조카 중에서 하나를 양자로 들여 놓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옹주와 정혼시켜서 옹주의 일본행을 막아 보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 일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종 김황진이 왕 대신 총독부 경무부에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종은 이듬해 봄 덕수궁에서 독살되었다. 이어 옹주의 일본 행은 강행되었다.


영친왕비 이방자는 동경역으로 나가 덕혜옹주를 마중한다.


“긴 여행에 많이 피로하시지요?”


옹주는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검게 두드러진 속눈썹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한참 예민한 나이에 그녀는 날카로운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방자는 덜컥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로부터 5년, 옹주의 나이 17세 때에 그녀의 생모 양씨가 유암으로 죽었다. 옹주는 순종이 죽었을 때 한번 고국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옹주는 어머니도 못 보고 강제로 일본에 돌아갔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번에는 아예 옹주의 귀국 자체가 빨리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옹주는 도일 이후 생전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옹주는 아예 말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녀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면서 낮에는 누워만 있었고, 밤이 되면 몽유병 환자가 되어 슈미즈 차림으로 정원을 거닐게 되었다. 그녀의 병명은 신경쇠약이나 몽유병보다도 더 무서운 조발성 치매로 진단되었다. 끝없이 입원과 요양 생활이 반복되었다.


대마도주 종 백작은 난데없이 조선 왕의 서녀인 덕혜옹주와 결혼하라는 지시를 일본 조정으로부터 받게 된다. 조선의 왕가에서도 우선 병을 치료하고 난 후 결혼해야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 백작과 덕혜옹주의 결혼은 일본 조정의 스케줄대로 강행된다.


두 젊은이가 서로 사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얼마 후 덕혜옹주는 자신을 닮은 딸을 낳는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정혜라고 지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의 동생 이름 같다고 해서 좋아했다. 그러나 그 딸은 부관연락선을 타고 가다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때 한국의 신문들이 그 자살을 어떻게 보도했는지는 확인하기조차 어렵다. 기생이 온천에 가서 자살한 사건에는 허구를 붙여 대서특필했던 신문들이 이 왕손녀의 자살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왕손녀의 자살에는 식민지 통치의 비인간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었지만, 조선 동아를 비롯한 모든 신문들은 이를 외면해 버렸다.


덕혜옹주의 병은 낫지 않았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벗어난 1953년 옹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제로 결혼하고 비밀리에 이혼 당한 그녀는 의지가지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62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은 그녀의 귀국을 허용한다.


그녀의 귀국을 반긴 이는 창경궁 낙선재 윤대비와 어려서 젖을 물려준 유모 변씨였다. 하지만, 기억을 상실한 옹주는 37년 전 유모 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서울대병원의 병실에서 꼬박 10년을 더 지내야 했다. 계절의 변화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그녀는 1989년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출처 :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c_booking&uid=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