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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강유정 - 왜 ‘재난’이 자꾸 먹히는 걸까

irene777 2016. 9. 1. 17:47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왜 ‘재난’이 자꾸 먹히는 걸까


- 경향신문  2016년 8월 11일 -





▲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 영화 <터널>의 한 장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하고 지속시켜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


또 재난이다. 올여름에 천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작품이 나왔는데, 또 재난 영화다. 13편의 천만 한국 영화 중 <괴물>, <해운대>, <부산행> 세 편이 재난을 다루고 있다. <설국열차>처럼 천만에 달하지 못한 작품들까지 더하자면 훨씬 더 비중이 높다. 왜 재난은 장사가 될까?


생각을 좀 바꿔 보자. 재난이 장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관객들이 공감한다는 걸 보여준다. 관객들이 재난이라는 상황과 괴로움에 쉽게 공감하는 것이다. 심지어 세 영화들에서 다루는 재난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이며 있음 직한 일 즉 허구이다. 한강에 서식하는 괴물이 서울을 혼란에 빠뜨리고, 아직은 없었던 쓰나미가 해운대를 덮친다. 심지어 <부산행>은 좀비다. 아예 있을 법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상으로 만들어 낸 환상에 가깝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영화들 가운데서 보는 것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의 말처럼 환상 역시 집단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꺼이 동의한 작품들은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의 결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된 재앙은 실제의 삶, 정치적 선택들 그리고 채 발화되지 못한 개인의 말들이 혼합된 환상이다. 한국 관객들은 희망이나 이념보다는 절망이나 재난의 상상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국뽕’ 논란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기 배치를 두고 국력이니 안보니 말하고 있지만 사실 많은 대중들은 이미 우리 정부가 강대국 사이에서 정말 자주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만 해도 그렇다. 원리·원칙을 따르며 옳은 주장을 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애먼 결론에 닿는 모습에 국뽕은커녕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영웅적으로 묘사되는 ‘국뽕’이 통할 리가 없다. 순진한 호응을 바라기엔 현실이 너무 어지럽다.


결국 사람들은 어설픈 희망이나 공익광고, 인공적 자긍심보다는 종말이나 파국, 재난에 공감을 표한다. <부산행>은 단순히 낯선 좀비들이 날뛰어서 신나는 영화가 아니라 부산행 KTX 열차가 우리의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해법도 꽤나 비관적이다. 대전역에서 내려라, 어디는 안전하다와 같은 정보들은 오히려 거꾸로 읽는 편이 낫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다. 아버지 석우가 딸아이 수안을 지키고 남편 상화가 임신부 아내 성경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난이란 무엇인가? 재난이란 국가가 관리해야 할 중요한 위기이다. 우리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을 갖추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난은 가족이 나서서 내 아들, 내 아내, 내 딸을 구하는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국가가 마스터플랜을 짜고 구조해내야 하는 사명이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 영화에서 재난은 가족의 몫이다. 그런데, 굳이 그것을 두고 거짓이나 과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국가가 개인을 포기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가족은 쉽게 가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터널>에도 이런 재난이 등장한다. 붕괴된 터널 안에 한 사람이 산 채 고립돼 있고, 그를 구하느냐 마느냐가 <터널>의 핵심 서사이다. 사실 국가란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는 이념이다. 과거엔 우리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게 당연했다면 이젠 국가가 우리를 위해 해줄 것은 해줘야 한다고 말할 때가 됐다. 적어도 재난만큼은 개인 몫으로 주어져서는 안된다. 아버지가 희생해서 딸을 구하고 남편이 헌신해 아내를 구하는 것은 영화적 상상이었으면 좋겠다. 시스템과 체계가 재난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첫째 조건이니 말이다.


기도하는 자를 뜻하는 라틴어 프레카리우스는 불안정성 때문에 현재에만 매달려 살면서 이 세속의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지옥임을 이미 알고 있는 자들의 구원 행위이다. 그러니 기도보다는 요구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살아서 지옥을 체험하는 자인가 아니면 지옥에서 그렇지 않은 삶을 찾는 자들인가? 재난의 값을 물어 마땅하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1211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