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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경집 - 이젠, 사회가 교육도 걱정한다

irene777 2016. 9. 6. 04:25



[김경집의 고장난 저울]


이젠, 사회가 교육도 걱정한다


- 경향신문  2016년 8월 17일 -





▲ 김경집

  인문학자



하버드대학이 인문학 과정을 강화했다. 일반적 흐름과 반대였다. 당시의 총장 드류 파우스트는 말했다. “이 코스는 첫 번째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버드 졸업생들이 여섯 번째 직업을 얻을 때 도움을 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삶을 재설계, 재구성, 리모델링할 수 있는 사회적 교육시스템이 없다. 수명이 늘어서 그에 맞는 개념이 오래전부터 도입되긴 했다. 이른바 ‘평생교육’이다. 정부, 지자체, 교육기관에 그거 담당하는 부서 다 있다. 그러나 거칠게 말하면 그 내용이란 게 거의 ‘취미, 건강, 오락’들이다. 그 과정을 통해 삶을 재설계했다는 경우를 별로 못 봤다. 개념도 현실적 대안도 변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평생교육’이라고 말만 외친다.


지식과 정보의 유효기간이 짧다. 갈수록 더 그렇다. 정보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대학은 이미 최상위 최종 교육기관의 능력을 잃었다. 직업과 업무가 요구하는 정보 속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그게 지금의 평생교육이 요구하는 실체다.


그런데 대학들이 마련하는 평생교육은 따로 논다. 기껏해야 알량한 직업교육이다. ‘네일, 뷰티’ 등의 직업교육이 대학이 해야 할 몫은 아니다. 대학이 맡아야 할 평생교육은 그런 게 아니다. 최신 지식과 정보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소화해서 일반인들이 당면할 미래 지식과 정보를 교습해야 한다. 그게 대학의 몫이다. 그게 대학이 맡아야 할 평생교육이다. 직업교육은 직업훈련원 등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학위 장사 문제를 떠나 대학이 시대정신과 미래 의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능력은 없고 돈은 밝힌다. 그건 대학이 아니다. 그런 짓에만 몰두하는 교육부도 이미 교육부가 아니다.


이미 학령인구를 초과한 대학 정원이다. 대학 졸업해도 취업은 난망이다. 수많은 사립대학들이 곧 무너진다. 파산도 매각도 못하는 대학들은 곧 사회적 부채가 된다. 이런 대학들이 개방대학으로 전환하여 업무에 필요한 최신 정보를 다루는 강좌들을 개설해야 한다. 졸업장이 무슨 의미인가. 자기 필요한 과목 수강하고 수업료 내면 된다. 그런 수업들로 자신의 능력을 증강해야 살아남는다. 새로운 삶을 선택할 기초도 마련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삶을 재구성하거나 새로운 선택을 돕는 사회적 교육시스템이 가능해진다. 대학도 살리고 시민도 도움을 받는 구조로 변모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부는 멀쩡한(?) 대학들에 미래라이프 운운하며 돈을 지원한다. 모양새에만 신경 쓰는 짓이다. 진짜 평생교육이 뭔지, 어떤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담을지는 관심이 없다. 현실을, 미래를 보지 못하니 그렇다.


누구나 자신에게 반대하면 불편하고 고깝다. 총장이 결정했는데 학생들이 몰려와 따지는 것 자체가 괘씸한 모양이다. 정부가 유인하는 돈에는 맹목적이면서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은 무시한다. 대학생들이 어린이는 아니다. 그들의 사고와 판단이 어리석다고 단정하면 그건 이미 대학이 아니다.


심지어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는 학교 관계자도 있다. 대학은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의 것이 아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자들이 학교를 운영하는 한 미래는 없다. 절차와 과정에서 설명과 설득, 경청과 보완이 필수적이다. 그게 민주주의고 교육이다. 그런데 그걸 무시한다. 대학에서 민주주의가 유린된다. 그러고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대학도 돈이 필요하다. 인프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교육은 시설에서 오는 게 아니다. 교육은 무형의 가치를 키우는 일이다. 그런데 유형의 자산 증식에만 몰두한다. 대학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 국제회의 할 장소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필수적인 건 아니다. 1년에 몇 번 쓰는가. 꼭 필요한 국제학술회의는 외부 장소를 빌리면 된다. 건물 짓는 데에 정신 팔린 대학들이 판친다. 거기에 가게들을 들이기까지 한다. 돈에 혈안이다.


대학은 외부 출연금과 기부금도 있지만 근간은 학생의 등록금으로 운영된다. 학생들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장학사업 등에 써야 한다. 대다수 학교가 장학금제도 있다고, 비율도 괜찮다고 변명할 일이 아니다. 학생들은 여전히 적은 시급 받으며 유목민처럼 일하러 다니기 바쁘다. 그래서 정작 공부할 시간이 없다.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이 낸 비싼 등록금으로 건물이나 짓고 있다면 그건 죄악이다. 지금이라도 유형자산이 아닌 무형자산이라는 교육 본연의 일에 충실할 일이다.


총장이 직접 경찰 투입을 요청한 건 충격적이다.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다. 여학생들이 그리도 폭력적이고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 위협적이었는가? 1600명이나 되는 경찰이 학내에 들어왔다.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려 했다. 연행도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걸로 이미 대학은 존재의미를 스스로 상실했다. 그걸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건 어떤 변명으로도 가리지 못한다. 처음에 총장은 자신이 부른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경찰이 반박했다. 경찰도 떳떳하지 않다. 이미 그걸로 끝난 거다. 그런데도 자리에 집착한다. 그건 이미 총장이 아니다. 스승도 아니다. 동문 선배도 아니다.


지난달 중국의 곡부(曲阜)에 다녀왔다. 거기에서 만난 공자는 권위적 인물이 아니었다. 우리는 공자의 권위만 본다. 그러나 공자의 진면목은 제자들의 질문에 개방적이었다는 점에 있다. 끝없이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 공자 학문의 바탕이다. 공자는 스승의 권위로 누르지 않았다. 질문과 대답의 과정은 놀라울 만큼 수평적 관계로 구성된다.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 묻고 다르게 대답했다. 때론 매섭게 야단을 치지만 쫓아내는 일은 없었다. 어리석은 제자는 깨우쳐주고 성미 급한 제자는 다독였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을 솔선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유연함을 견지했다. 그게 스승이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이며 탈권위적인 모습이다.


교육부는 더 이상 돈으로 대학을, 교육을 주무르려 해서는 안된다. 그게 가장 반교육적 방식이다. 교육현장의 경험도 철학도 없는 자들이 고시를 통해 고위관료가 된다. 그들이 교육정책을 좌지우지한다. 교육의 진정한 가치와 학생들에 대한 사랑보다 학교 ‘경영’과 자신의 보직에만 충실하려는 자들이 총장의 직을 탐한다. 자신의 선택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경찰 병력의 대학 진입을 요청하는 총장은 스스로 물러나야 옳다.


교육과 종교가 타락하면 그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교육자와 종교인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사회가 타락해도 오염된 사람들은 비판하지 못한다. 그러면 끝이다. 그 절망의 늪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이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게 교육자, 종교인의 존재의미와 가치다.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 이젠 사회가 교육도 걱정한다. 이러다 회생불능이 된다. 총장이 경찰을 불러들이는 대학.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한다. <논어>를 읽으며 무더운 여름을 건너야겠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72048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