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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종회 - 우병우의 처신과 우탁의 길

irene777 2016. 9. 27. 01:46



[시론]


우병우의 처신과 우탁의 길


- 경향신문  2016년 95일 -






▲ 김종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현존하는 가장 오랜 시조집으로, 18세기 중엽 조선조에 김천택이 엮은 <청구영언>이 있다. 이 책에는 황진이의 명편 시조들과 함께, 한국 시조 역사의 들머리에 해당하는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시조 2편이 실려 있다. 탄로가(嘆老歌), 곧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다. 2편 모두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것이나, 그중 하나를 현대어로 풀어서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지금도 시인을 기리는 시조문학제와 시조문학상이 운영된다.


우탁은 문인이자 학자이며 고려조 관료였으며 기개와 절조, 학문과 실행을 겸비한 위인이었다. 고려 25대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26대 충선왕이다. 부왕의 사후에 충선왕은 그 아비의 후궁인 숙창원비를 가까이했다. 이를테면 왕도는 물론이고 혈연의 질서를 무너뜨린 패륜이었다. 신하들이 사실을 알면서도 말 못하고 있을 때 목숨을 걸고 극간에 나선 이가 우탁이었다. 우탁은 흰 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나가 상소문을 바치고 엎드렸다. 이와 같은 상소를 두고 도끼를 소지했다 하여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한다.


상소 중에서 이보다 더 강력한 주장은 없다. 내 말이 틀리면 도끼로 내 머리를 치라는 뜻이다. 차마 상소문을 왕에게 읽어 아뢰지 못하는 신하가 우탁의 호통에 벌벌 떨며 읽고, 그 명분과 기세에 밀린 왕이 결국 패륜의 행위를 중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학의 정신주의가 도도한 흐름으로 관류한 우리 역사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올곧은 선비정신의 표본이었다. 이와 같은 지부상소의 사례는 그 이후로 이어져서,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이었던 조헌의 상소와 병자수호조약 체결 후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 불리는 최익현의 상소가 일컬어진다.


조선조 유학의 거목 퇴계 이황이 가장 존경한 선진이 바로 우탁이었다. 퇴계가 그렇게 심복한 데는 우탁이 선비로서의 청정한 몸가짐과 더불어 탁발한 학문적 경지를 함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주역>은 동양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동시에 가장 난해한 글이다. <주역>이 전래되었을 때 아무도 이를 풀어내지 못하자, 우탁은 혼자 문을 걸고 연구한 끝에 달포 만에 그 진의를 터득해 그로써 후진을 가르쳤다. 그를 존중하는 학자들이 이를 두고 ‘역이 동으로 옮겨 갔다’고 하여 ‘역동’이란 호를 붙였다.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서원이 역동서원인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들어가게 되자 이를 안동대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 서원은 퇴계의 발의로 건립됐다. 역시 우탁을 기리는 구계서원 또한, 같은 사정으로 영남대로 옮겨졌다. 이토록 선비정신을 지킨 그 삶이 수발했고 성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도저했으며, 지금까지 여러 모습으로 기림을 받는 역사적 인물이 우탁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역동 우탁의 후대가 지금 한창 국정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란 사실이다.


우병우 수석이 지금 보이고 있는 사태 대처의 방식은, 식견 있는 이들이 보기에 그 빛나는 조상의 이름에 비추어 전혀 합당하지 않다. 우탁이라면, 그 역사의 시공을 뛰어넘어 경모를 받고 있는 조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한번쯤 되돌아보았으면 어떨까 싶다. 지부상소의 공명정대, 저 옛날 역사의 거울에 현실의 한 자락이라도 비추어 보면 결론은 너무도 명백하다.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진 혐의만으로도 그 직을 지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정말 억울하다면 우선 물러나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정수석이란 직위를 앞에 두고 특별감찰관이든 검찰이든 제대로 활동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엄정한 조사 후에도 책임질 문제가 없다면 다시 복귀하는 방법도 없지 않다. 그래야 본인 자신은 물론, 그 배면에 서 있는 대통령도 떳떳할 터이기에 그렇다. 임용권자로서의 대통령도 보다 전향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울며 아끼는 부하 마속을 벤 읍참마속의 고사가 있다. 마속을 베지 않고서는 군의 기강을 다잡을 수 없어서였다. 세종이 성군으로 불린 여러 연유 중 선명한 하나는, 상벌 적용이 합리적이었던 대목이다. 예컨대 훈민정음 창제에 정면으로 반대한 최만리를 두고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고 질타하며 하옥했지만, 그 상소의 문면이 논리 정연한 까닭을 들어 다음날로 방면했다.


이럴 때 지도자의 판단력이 빛을 발한다. 오늘날과 같은 여론 중심의 시대에는 결정적 판단을 위한 정보의 흐름에 친숙해야 하고, 그로써 정국의 운용이 순리를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우병우 문제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작은 사건’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큰 사태’로 만들기 십상이다. 레임덕을 걱정하다 둔 악수가 오히려 그것을 재촉할 수도 있다. 당사자나 임용권자가 모두 이를 정권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 절실해 보인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052115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