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큼메마시
- 한겨레신문 2016년 9월 13일 -
▲ 박구용
전남대 교수, 시민자유대학 이사장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새삼 힘을 얻고 있다. 국가권력을 가진 자들과 가지려는 자들이 지난 총선 이후 잇따라 호남에 머리를 조아린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대권 후보들이 호남을 들락거리며 민망할 만큼 애정을 표출한다. 심지어 그동안 호남고립 전략으로 영남패권을 다져온 새누리당 대표조차 호남과 연합하자며 떡고물을 흘린다.
호남이 득세한 것일까? 아니다. 그래도 득세를 노리는 자들은 반드시 호남의 지지와 동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재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박원순, 김부겸, 안희정, 손학규, 안철수는 물론이고 새누리당 후보조차 호남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대통령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인정(recognition)은 상호적이고 대칭적이어야 한다. 인정받으려면 인정해야 한다.
독일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인정은 자연스런 감정도 윤리적인 덕성도 아니다. 인정은 사랑과 투쟁의 교차로에서 상대의 가치를 바로 알았을 때 뒤따르는 정치적 행위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벌리는 인정은 사실 무시에 가깝다. 바른 앎이 상호인정의 첫걸음인 셈이다. 상호인정을 위해 호남의 속살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월간 <전라도닷컴>(www.jeonlado.com)보다 좋은 안내서는 없다. 이 고귀한 잡지를 173번 만들어낸 황풍년 편집장이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이란 책을 새로 냈다.
황풍년은 왜 호남이 아니라 전라도를 말할까? 전라도는 호남과 같은 말이면서 다른 말이다. 두 말이 가리키는 대상 공간은 같으나 품고 있는 뜻은 사뭇 다르다. 호남은 지리적 공간과 정치적 공간을 가로지르며 중성화된 보편적 교양어로 자리잡았다. 반면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를 모아 만들어진 전라도는 보편화 과정에서 점차 누락된 특수한 잔여문화의 상징처럼 치부되면서 외면받아왔다. 그러니 황풍년의 전라도 미학은 배제되고 감금된 채 잊히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편적인 주류문화를 비판하는 정치학이다.
황풍년의 전라도 미학은 인용부호 안의 말을 표준어로 바꾸지 않고 전라도 입말 그대로 옮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입말만이 가공되지 않은 마음, 곧 전라도 정신을 드러낸다. “개버와, 암시랑토 안 해. 요런 게 무거우문 시상을 어찌 산당가.” “시상일이라는 것이 급허니 헌다고 되는 게 아니제, 싸목싸목 해야제.” “항꾼에 노놔 묵어야 게미지제. 항꾼에 놀아야 재미지제.”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든 거듭 소리내서 읽어보면 그 뜻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암시랑토’, ‘싸목싸목’, ‘항꾼에’는 전라도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란다. ‘아무렇지도’, ‘천천히’, ‘함께’라는 표준어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말의 뼈만 남고 살은 녹아서 사라져 버린다. 어르신들의 입말은 그 자체로 전라도 정신의 몸이고 살이다. 무시를 무시하고, 멸시를 멸시할 힘이 있으니 이 땅의 자존심을 꿋꿋하게 지켜온 어르신들은 암시랑토 안 하다. 시도 때도 없이 쪼아대고 윽박질러도 예나 지금이나 이들은 싸목싸목 할 일은 한다. 그렇게 쪼개져 서로를 할퀴는 세태에 휘둘리지 않고 항꾼에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키운 것이다.
전라도의 힘과 맛, 맘과 멋을 횡단하며 황풍년은 ‘촌스럽게, 아름다운’ 전라도의 속살을 귄있고 게미지게 보여준다. 그의 웅숭깊은 글을 타고 구김 없이 쾌활하게 모든 생명과 따뜻한 인정을 주고받는 데에 고수인 전라도의 촌스러움은 대한민국의 아주 오래된 미래의 고향이 된다. 이런 전라도 미학도 모르면서 정권 획득을 노리고 조급하게 호남의 등에 올라타려는 자들에게 어르신들이 한마디 건넨다. “큼메마시…”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13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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