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칼럼>
분단체제에 기생하는 박근혜 정권
- 한겨레신문 2014년 12월 24일 -
▲ 정석구 편집인
통합진보당을 해산한 헌법재판소의 법리가 얼마나 무리한지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에 반대하는 것과 이 당을 해산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헌재 재판관 8명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반대 여론과 자신들의 공안적 소신을 곧바로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연결했다.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비논리적인지는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낸 김이수 재판관의 논지 (☞ 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669914.html?recopick=5) 에 비춰보면 잘 드러난다.
해산 결정이 8 대 1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이뤄진 것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반영된 결과라는 지적도 있지만, 박정희 독재의 길을 열어준 유신헌법도 투표율 91.9%, 찬성률 91.5%로 통과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의 역사적 당위성’이 국민의 승인을 받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독재는 늘 합법의 탈을 쓴 채 국민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끓어오르는 저항을 무력화하면서 슬그머니 우리의 일상을 옭아맨다.
헌재 결정 이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이념 갈등이다. 헌재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우리 사회의 소모적인 이념 논쟁을 종식시키길 바란다”고 했지만 오히려 이념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보수단체는 헌재 결정이 나오자마자 이정희 전 대표를 포함해 통합진보당 당원 전체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도 기다렸다는 듯이 진보세력에 대한 공안몰이에 나섰다. 저항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남북 분단 국면에서 이처럼 이념 갈등이 전면에 부각되면 접점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6·25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은 상황에서 이념 갈등은 곧 ‘전쟁 상태’를 의미한다. 전쟁 상태에서는 적과 동지만 있을 뿐 중간지대가 용납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이념을 가진 집단은 배제와 말살의 대상이지 타협이나 포용의 대상이 아니다.
이번 헌재 결정 법리의 바탕에는 이런 전쟁 논리가 깔려 있다. 헌재가 통합진보당 해산과 함께 이 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국회에서 몰아내고 정부·여당이 통합진보당 당원들의 피선거권까지 박탈하려는 것도 이런 전쟁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면 다양성과 포용성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는 설 땅을 잃게 된다. 통합진보당 해산을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보세력들이 통합진보당식 ‘종북 진보’를 청산하고 ‘순수 진보’로 거듭나면 될 게 아니냐고 하지만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우선 종북이란 개념 자체가 너무 포괄적이다. 그리고 어떤 개인이나 정치세력이 종북인지 아닌지를 누구의 판단에 맡긴단 말인가. 지금 칼자루를 쥔 쪽은 합법적 공권력을 장악한 수구·냉전 정권이다. 배제와 말살 논리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종북 숙주’나 ‘유사 통진당’으로 몰아붙여 가차없이 종북의 칼날을 휘두를 것이다. 그들의 잣대를 만족시킬 ‘순수 진보’는 없다.
남북 화해와 평화가 진보세력의 성장이나 민주주의 발전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분단 상황을 고정 변수로 두고 북한을 ‘악의 화신’으로 상정하는 한 이념 갈등은 불가피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가 그런 상황이었다.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고, 안보를 빌미로 정부에 비판적인 개인이나 단체를 빨갱이로 몰아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유지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꼭 그런 길로 가려 하고 있다.
분단체제에 기생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구·냉전 세력이 득세하는 한 민주주의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진보의 재구성에 앞서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은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이념 갈등을 조장하는 ‘냉전 숙주’를 뿌리뽑는 일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는 분단체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편집인 twin86@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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