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박노자 - 한국에서 불가능한 것, 인간의 존엄성

irene777 2014. 12. 27. 18:07



한국에서 불가능한 것, 인간의 존엄성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신문  2014년 12월 23일 -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 한국학



근대 철학에서 ‘인간의 존엄’을 칸트가 최초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가 발명한 것은 존엄성이 있는 자율적 개인이다. 자율성이란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에 늘 똑같은 보편적 도덕 기준을 적용하고 이 기준, 즉 본인 양심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체제 부정의 길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개인적 양심상 미국의 패권과 계속 맞서고 있는 북한이 내가 생각하는 ‘반패권’의 보편적 원칙에 더 가깝다고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순간, 나는 바로 국사범이 되고 만다.


대개 매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사건·사고, 스캔들 등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정보다. 일상 그 자체는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뉴스로서 상품 가치가 없다. 예컨대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빈번한 산재 사망 사고의 나라인 한국에서 하루에 평균적으로 5~6명의 노동자가 직장에서 사고사를 당하는 것은 그다지 뉴스로서 가치가 높지 않다. 공사장의 추락·사망 사고 같은 것은 보도된다 해도 보통 짧은 단신 보도일 뿐이다. 직장에서의 사고사는 이곳에서는 ‘정상’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304명이 사망, 실종되면 이는 언론에서 ‘참사’로 명칭돼 집단의식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영구적 트라우마가 된다. 있을 수 없는, ‘비정상’의 극치를 달리는 일인 만큼 이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되면 안 되는 점은 이 ‘비정상’이 우리 일상 속의 ‘정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이 이윤 극대화 차원에서 매일 노동자들을 희생시키고 국가가 이를 거의 수수방관하는 사회라면, 같은 자본과 국가가 왜 수백명의 빈민 지역 출신들을 희생시키지 못하겠는가? 반인륜적 ‘정상성’이 사회적인 대량 타살, 즉 학살의 ‘비정상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계속 반복되는 이런 이어짐은 바로 우리 삶의 일상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번의 ‘조현아 땅콩 회항’도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의 일부분이다. “무릎 꿇어라”고 부하에게 고함지르는 것은 대한민국 학교나 군대에서는 그저 ‘정상’, 거의 ‘상사/상관의 고유한 권리’처럼 인식돼 왔다. 무릎 꿇린 뒤에 큰 폭행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매체 보도도 될 리가 없다. 기업도 크게 봐서 마찬가지다. 기업 같으면 무릎 꿇린 뒤에 큰 폭행이 이어진다 해도 보통 별다른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4년 전에 에스케이(SK)그룹 창업주의 조카인 최철원(M&M 회장)이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감히’(?) 일인시위를 벌이던 훨씬 연상의 운전기사를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려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힌 뒤에 과연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았는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봉사시간 120시간이었다. 재벌 2세는 노동자를 무릎 꿇려 마구 패도 실형 살 일은 당연히(?) 없다. 그리고 폭행이 보도되는 당시에 사회적 논란은 잠깐 일어나도, 몇달 사이에 해당 재벌의 이미지에 별다른 손상이 가지 않은 채 사건은 조용히 망각된다. 윗분이 아랫것을 무릎 꿇려 패는것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그저 때와 장소를 잘못 골랐을 뿐이다. 외국에서 회항까지 시켜 이 일이 ‘비정상’으로 처리돼 국내외 언론의 보도 대상에 올랐지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자기 사무실에서 관례대로 ‘혼내는’ 절차를 진행했다면 과연 세상은 알기라도 했을까? 조직생활 하면서 이런 종류의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까?


그러면 이제 의분을 가라앉혀 한번 분석해보자. 한국 사회의 ‘주인님’들에게 ‘아랫것’의 자존감을 일상적으로 깡그리 무너뜨려 부숴버리는 것은 왜 그렇게도 중요할까? 왜 -심각한 폭행 등의 ‘비정상’으로 치달을 경우- 사회적 지탄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이렇게도 열심히들 면박 주고 폭언을 퍼붓고 무릎 꿇리고 때리는가? 물론 개개인의 심리를 따져보면 아동기의 애정결핍증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병리의 원인들은 다 있지만, 아랫것의 자존감을 깡그리 짓밟는 것은 한국에서 단순히 가해자 개개인의 ‘심리적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 지배계급의 일종의 아비투스, 즉 관습의 차원이다. 그리고 개개인이 아랫것을 열심히 모욕하면서 이를 꼭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아비투스는 꼭 그렇게까지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차원에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아비투스는 한국 지배계급의 하나의 ‘전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자존감 내지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풀어보자.


근대 철학에서 ‘인간의 존엄’을 본격적으로 칸트가 최초로 다루었다. 칸트가 본 인간의 존엄은, 인간이 그 자체로서 (도구가 아닌) 목적임을 뜻했다. 인간에게 존엄이 있자면 인간이 사회에 의해서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은 체제 부정의 길로 가려는 반골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적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 존엄의 정의는 가히 전복적이라 하겠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그 자체로서 목적’인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인간은 잉여가치 수탈의 장본인이 되지 못하는 이상 대개는 잉여가치의 직접 생산자, 즉 ‘인력’에 불과하다. 잉여가치 수탈의 극대화, 즉 ‘수익성 제고’를 위해서라면 ‘인력’을 위험천만의 작업환경에 노출시켜도 되고 과로사하게끔 혹사해도 된다. 왜냐하면 이에 따르는 처벌은 어차피 수익성을 크게 훼손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극단적으로 실행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인력’이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즉, 한국형 자본주의와 인간존엄성은 양립이 거의 불가능하다.


칸트가 발명한 것은 존엄성이 있는 자율적 개인이다. 자율성이란 자기 자신에게도 외부적 세계에도 늘 똑같은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고 가급적 이 기준, 즉 본인 양심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아예 체제 부정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한반도 정치의 차원에서 나의 개인적 양심상 미국의 패권과 계속 맞서고 있는 북한이 내가 생각하는 ‘반(反)패권’의 보편적 원칙에 더 가깝다고 내가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바로 남한의 국사범이 되고 만다. 굳이 ‘우리 모두의 적대적 타자’인 북한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남북한 지배자 사이의 갈등에 나의 양심상 동원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나 개인의 ‘중립’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남한 군대의 징병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이미 범죄자, 평생의 전과자, 죽을 때까지 이등 시민이 된다. 정치적 문제는 아니더라도 나의 양심대로, 존엄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늘 사회에의 도전에 가깝다. 예를 들어 생활 수준을 고려할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등록금을 학생들로부터 갈취하고, 동시에 사회적 차별의 도구로 전락한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 대신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선언하는 ‘양심적 대입 거부자’라면 고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이 학력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 군부대와 착취공장을 그 기본 모델로 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적 양심도 자율성도 존엄성도 폭발물과 같은, 불순한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화 과정에서 커가는 인간에게 각종의 모욕, 모멸감을 주어가면서 인간적 존엄성을 서서히 박탈하는 구조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병영형 착취공장에서 평생 열심히 일할 노동자가 순치돼가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피훈육자나 부하를 머슴처럼 대하는 현대판 마름이나 악질 지주들의 못된 버릇 그 자체는 나로서 가장 한심한 것도 아니다. 나는 준주변부형 신자유주의 사회의 관리자들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투쟁으로 우리 존엄성을 쟁취하지 않는 이상 저들의 버릇들은 절로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가장 한심한 것은, 현대판 양민이라고 할 한국의 소비대중들이 현대판 천민인 저임금·하급·서비스직 (대부분은 비정규직이자 여성) 노동자들에게 관리자들과 같은 갑질을 해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사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당한 직장인이 마트에 가서 더 약한 노동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원풀이한다는 셈이다. ‘조현아 땅콩 회항’과 함께 한국적 갑질의 상징으로 뽑힐 만한 장면은, 영화 <카트>에서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진상 고객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명장면일 것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고민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소비대중들은 억압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그들이 조현아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을 발견하기를, 진심으로 빌 뿐이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0424.html>